[김병준의 말] 고민도 답도 없는 ‘진보’와 ‘보수’

입력 2017-03-0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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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청와대 정책실장

1970년대 이야기이다. 유명 사립대학에 인문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한 사람 있었다. 40대 후반에 이미 국제적으로도 꽤 알려진 학자였고, 본인 스스로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시골 고향에만 가면 아주 궁색한 처지가 되곤 했다. 수시로 “자네는 몇 급인가?”, “군수보다 높은가?” 따위의 질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교수이고, 더욱이 사립대학 소속이라 그런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고, 결국 “면장급도 안 되는 모양”이라는 말이 돌아다니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출세는 한 것 같은데 동네에서는 여전히 말이 많다. 어떠냐? 지금이라도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게. 네 머리면 바로 될 것이고, 또 그동안 한 일이 있으니 잘 올라가지 않겠나?”

세상을 보는 눈이 없으면 이렇게 의미 없는 질문을 하고, 의미 없는 논쟁과 싸움을 한다. 그러고는 얼토당토않은 답이나 해결책을 내어 놓는다.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하고 있는 교수를 보고 교수직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보’, ‘보수’ 하며 싸우는 것을 볼 때마다 젊었을 때 들었던 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진보요, 보수요?” 하고 물어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인문학 교수나 시인이나 화가를 보고 군수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꼭 알아야 하겠다고 덤비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진보, 보수의 구분 자체가 천박하다. 경제 문제를 예로 들면 흔히 보수는 성장을 중시하고, 진보는 분배를 중시한다고 한다. 맞나? 분배가 안 되면 소비가 죽고, 그래서 결국은 경제가 죽는데 어느 보수이론이 분배를 무시할 수 있나? 또 성장이 안 되면 분배할 것이 없는데 어느 진보이론이 성장을 무시할 수 있나?

두 이론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만들 만큼 그 차이가 크다. 하지만 우리의 진보, 보수는 다르다. 이런 것에 대한 큰 고민이나 생각 없이 나뉘어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안은 문제에 대한 이해조차 돼 있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일례로 글로벌 분업 구조의 재편 문제를 보자. 자동화와 로봇 기술의 발달 등으로 사람이 필요 없게 되면서 제조업의 거점이 수요시장이 가깝고 에너지 가격이 싼 곳, 이를테면 미국과 같은 국가로 옮겨지고 있다. 제조업 중심의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로서는 큰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의 진보와 보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답을 갖고 있을까? 어떤 산업을 정리하고 어떤 산업을 일으킬 것인지, 또 이를 위해 자본과 노동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지, 그리고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인적자원은 어떻게 길러낼 것인지 등에 대한 고민이 있을까?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고민도 답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철 지난 좌우 논리로 고민과 답을 찾는 노력을 방해하기도 한다. 영국의 블레어 총리가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제시하면 ‘제3의 길’이라며 손뼉을 치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길이 제시되면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느니,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하느니 비난을 해댄다.

심지어 진보, 보수의 이름으로 진보, 보수의 기본원칙과 철학을 짓밟기도 한다. 진보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가볍게 여기며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나, 보수가 ‘자율’의 철학을 뒤로한 채 권위주의 문화를 정당시하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권력과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패거리와 진영으로서의 구분, 국민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구분, 이것이 이 나라의 진보, 보수가 돼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문학 교수가 군수보다 높은가 낮은가를 두고 동네를 쪼개듯, 의미 없는 진보, 보수 논쟁으로 나라를 쪼개고 있다.

이래서 되겠는가? 최소한 지식인들이라도 이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 시대가 안은 문제에 대해 올바른 고민을 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의미 없는 싸움에 함몰돼 어느 한쪽 편들기나 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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