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 수십 년의 디플레에 익숙해져…소비 대신 저축 너무 좋아해”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이 마이너스 기준금리와 대규모 양적완화 등 세계에서 가장 과격한 통화정책 실험을 펼쳐왔으나 기대한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수십 년의 디플레이션에 너무 익숙해져 BOJ의 돈을 찍어내는 정책에도 소비 대신 저축에 집착하는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고 26일(현지시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WSJ는 BOJ의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 모녀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일본 경제가 버블 전성기에 있던 1980년대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는 한달 월급을 통째로 털어 캐시미어 코트를 사곤 했지만 딸은 쇼핑하는 대신 어머니의 옷장에서 입을 옷을 찾는다는 것이다. 현재 도쿄에서 거주하는 26세의 시바타 나나코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내 옷의 3분의 1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자신의 고향에 갈 때 고속철인 신칸센보다 싼 버스를 이용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는 이미 초저금리 기조에서 탈피해 금리인상 가속화를 저울질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지금의 경기부양책을 다소 축소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구로다 하루히코가 BOJ 총재에 취임한 지난 2013년 4월 이후 ‘충격과 공포’로 불릴 정도로 공격적인 완화정책을 펼치고 있으나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 요원하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최근 일본의 물가상승률은 제로(0)%에 가깝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해 11월 2% 물가상승률 목표 달성 예상 시기를 뒤로 미루면서 더는 펼칠 아이디어가 없다고 시인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물가상승률이 수개월 간 0%를 소폭이나마 넘긴 것에 대해서도 일본 경제펀더멘털의 개선이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 이후 펼쳐진 강달러와 국제유가 상승 등 외부적 요인이 크다고 지적했다.
디플레이션이 되면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고 임금을 삭감하며 고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고 이에 소비자들도 지출을 멈춰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에 BOJ가 디플레이션과의 전쟁에 나선 것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BOJ는 미국과 유럽, 영국 등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던 때보다 훨씬 전인 1999년 금리를 0%에 가깝게 낮췄다. 2001년에는 국채 매입으로 대표되는 양적완화를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구로다 총재 시대에 들어서는 금융시스템에 연간 7000억 달러(약 794조 원)를 투입하고 지난해에는 금리를 마이너스까지 낮췄으나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일본 물가는 지난 1990년대 말부터 떨어지기 시작했고 연평균 경제성장률도 1%에 미치지 못했다. 한때 세계 2위 경제국이었지만 이 타이틀도 중국에 넘겨준지 오래다. 일본증시 닛케이225지수는 1989년 정점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디플레이션 사고방식은 20~34세 이르는 2000만 명 일본 젊은이들에게 특히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이들은 바로 물가 하락 시기에 성장해 임금인상과 주가 상승 또는 높은 예금금리 등 경제호황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최대한 돈을 절약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습관화된 세대다. 친구들이 공동으로 한 집에서 살고 3달러하는 쇠고기 덮밥으로 끼니를 떼우는 것이 이들 젊은이들의 일상이다.
BOJ가 지난해 10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5%의 응답자만이 ‘2017년에 더 많은 돈을 쓸 것’이라고 답했고 48%는 ‘절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디플레이션 사고방식에 가장 큰 혜택을 봤던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 설립자인 야나이 다다시는 중앙은행의 마이너스 금리와 양적완화 등 통화정책이 오히려 문제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정책은 소비자들이 미래를 걱정하게 만든다”며 “BOJ는 마이너스 금리를 멈춰야 한다. 이는 바보같은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니클로도 지난 2015년 가격을 인상했다가 판매 역풍으로 다시 낮춘 쓰라린 기억이 있다고 WSJ는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