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한참을 가다 이번에는 장교가 신문을 꺼내 펼쳤다. 그러자 유대인이 이를 확 빼앗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장교가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유대인이 말했다. “예비행위도 행위에 준한다.” 장교가 물었다. “행위라니? 무슨 행위?” 유대인이 말했다. “이 안에서 변을 보면 안 되지.”
탈무드 이야기 중 하나다. 우습다고? 그래 우습다. 그런데 최근 한동안 이 우스운 이야기가 전혀 우습지 않았다. 이를 닮은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심각하게 우리 주변을 어지럽혀 왔기 때문이다.
직접 관계된 이야기를 하나 하자. 오래전 아내가 이화여대 여성최고경영자과정에 다닌 적이 있다. 솔직히 집에서 살림 사는 주부가 뭐 그리 다니고 싶었겠나. 여러 채널을 통해 꼭 좀 등록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해 등록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게 문제가 됐다. 이 과정의 총동문회장이 우병우 전 수석의 장모인 김장자 기흥 CC 회장이기 때문이다. 이 동문회를 통해 아내와 김 회장이 서로 잘 알 것이고, 또 김 회장은 최순실과 잘 알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들이 돌아다녔다.
일부 언론은 전직 대통령의 부인과 한광옥 비서실장 부인 등도 이 과정에 다닌 것을 들어, 마치 이 과정이 김 회장을 고리로 한 최순실 인맥의 원천인 것처럼 인맥도까지 그려가며 기사를 썼다. 그러더니 심지어 필자가 총리 후보로 내정된 것도 이 인맥과 관련이 있다는 뉘앙스까지 풍기기도 했다.
한동안 아내와 김 회장이 서로 일면식도 없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해야 했다. 때론 ‘맹세코’라는 말을 붙여가면서 말이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만난 적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서로 알고 지냈느냐 아니냐를 문제 삼을까?
의심이야 할 수 있다. 협잡이든 농단이든 모르는 사람보다는 알고 지내는 사람과 같이 도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클 뿐,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경우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아는 사람과는 반드시 나쁜 것을 해왔던가? 정의든 불의든 부탁이면 다 들어주었던가?
그런데 최근의 상황이 영 그렇지가 않다. 누군가를 아느냐 모르느냐, 만난 적이 있느냐 없느냐가 농단과 협잡의 중요한 기준이 되곤 한다. 일부 기자나 국회의원은 심지어 고향이 같다거나 사진 한 장 같이 찍은 적이 있다는 것을 농단과 협잡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신문 펴는 것을 보고 변을 본 것이라 소리치는 꼴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그 하나는 농단과 협잡의 증거를 찾거나 논리로 따질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해가 된다. 기자나 국회의원으로서는 사실 관계를 더 이상 파고들기 어려운 벽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상대를 미워하고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합리적 사고를 앞서기 때문이다. 러시아군 장교와 유대인의 관계에서처럼 말이다. 이 역시 이해가 된다. 박근혜 정부의 잘못이 그만큼 큰 데다, 일련의 국정농단과 협잡에 대한 반감 또한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키울 일이고, 미워하는 감정이 앞서면 이를 통제할 일이지 사람이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상을 만들어서야 하겠나. 이렇게 하면 학교는 어떻게 다니고, 고향 사람들과 사진 한 장인들 어떻게 찍겠나.
무엇 때문에 기자를 하고 국회의원을 하나? 사람이 사람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아니던가. 생각해보라. 얼마나 자주, 또 많이 “예비행위도 행위에 준한다”고 말해왔는가를. 그래서 얼마나 더 험한 세상을 만들어왔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