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26 만월태후

입력 2017-01-0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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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모정을 담아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다.

만월태후(滿月太后)는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후비(後妃)이다. 경수(景垂) 혹은 경목(景穆) 왕후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서불한(舒弗邯) 김의충(義忠)이다. 경덕왕의 왕비는 김순정(金順貞)의 딸 삼모부인(三毛夫人)이었으나 아들이 없어 출궁되고, 743년(경덕왕 2) 4월에 만월부인이 후비로 입궁하였다. 그러나 만월부인 역시 쉽게 아들을 낳지 못했다. 입궁한 지 15년 만인 758년(경덕왕 17)에 겨우 아들을 낳았다. 신라 제36대 혜공왕이다.

765년(경덕왕 24) 6월 경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혜공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 당시 혜공왕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였기에,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태후(太后)로서 섭정을 하였다. 혜공왕은 18세가 된 775년(혜공왕 11)경에야 친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월태후가 11년간 섭정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만월태후의 섭정기에는 크고 작은 반란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삼국유사’에는 “태후가 조정에 임하니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도둑이 봉기해도 막을 겨를이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어린 왕의 즉위가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여성의 정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된 상황에서 만월태후의 섭정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진골 귀족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만월태후는 771년(혜공왕 7년)에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게 하였다. 이 종은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 종을 만들 때 가난한 집 어린아이를 넣어 완성하였기 때문에 종을 칠 때마다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것과 같이 ‘에밀레’라고 한다는 것이다. 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사람 뼈를 이루는 ‘인’이 검출되지 않아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성덕대왕 신종이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성덕대왕 신종은 원래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위하여 만들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혜공왕이 아버지 경덕왕의 뜻을 받들어 완성해 봉덕사에 두었다고 전해온다. 봉덕사는 혜공왕이 속한 중대 왕실의 중시조인 태종무열왕을 기념하는 원찰이다. 성덕대왕 신종은 태종무열왕에서부터 할아버지 성덕왕, 아버지 경덕왕을 거쳐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중대 왕실이 집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반란으로 혜공왕의 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만월태후는 성덕대왕 신종을 통해 혜공왕이 혈통적으로 중대 왕실의 정통 왕위 계승자임을 내세워 어린 아들의 무사안위를 기원한 것이다. 하지만 만월태후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혜공왕은 왕위에 오른 지 16년 만인 780년,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 와중에 왕비와 함께 피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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