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내년에도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겠다고 예고했다.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지 않거나, 인상을 최대한 유보하겠다는 입장이다. 본격적으로 금리 인상에 돌입한 미국과는 반대 행보다.
대내외 금리 차가 줄어들어 자본 유출이 우려됨에도 불구하고, 경기 부진과 가계부채에 따른 금융안정에 무게를 뒀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가 가파를 경우 한은도 어쩔 수 없이 인상 기조에 동참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29일 한은은 ‘2017년 통화신용정책 운영방향’을 통해 “내년 경제의 성장세 회복이 이어지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물가안정목표에 접근하도록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지난 6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결정된 연 1.25%의 저금리 기조는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앞서 지난 14일(현지시각) 미 연준(Fed)이 정책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데 이어 내년에도 2~3차례 추가 금리 인상을 시사한 만큼 대외금리가 축소돼 한은이 받게 될 인상 압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0.50~0.75%인 미국금리가 2번만 올라도 우리나라 금리와의 격차는 0.25%포인트 이내로 줄어든다. 사실상 금리가 같아지는 셈이다. 이 경우 외국 자본이 대규모로 국내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달러 강세가 계속해서 유지할 경우 외국인의 시선은 더욱 미국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이유로 과거 한은은 미국이 금리에 변화를 주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같은 방향으로 금리를 움직여왔다. 우리금융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이 기준금리를 조정한 뒤 한국은 평균적으로 10개월 이내에 뒤따라 가는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이 내년 상반기 0.25%포인트씩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올릴 것을 가정할 경우, 한은이 고민할 수 있는 시간도 단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주변 신흥국마저 이에 동조해 금리 인상에 나서게 된다면 한은에 주어진 시간은 더욱 짧아지게 된다.
하지만 과거와 달라진 점은 자본유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한국경제에 대한 대외 신인도가 두텁다는 점이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한 지 2주가 지났지만, 우려와는 달리 외국인 투자자들의 ‘바이 코리아’는 계속되고 있다.
이달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1조552억 원어치 순매수를 보였다. 미국이 금리 인상에 나섰던 직후였던 지난 21일에는 오히려 외국인이 코스피에서 보유한 주식의 시가 총액이 465조2450억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종전 최대치인 지난 9월30일 기록(452조6719억 원)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와 함께 실물경기 부진은 한은이 쉽게 금리를 올리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다. 전날 정부는 내년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0%에서 2.6%로 하향 조정했다. 정부가 2%대 성장전망을 내놓은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여파가 계속되던 1999년 이후 처음이다. 그만큼 경제 부진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크다.
가계부채 불안도 문제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6개월째 동결하고 있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라 시중금리가 치솟으며 예금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10개월 만에 3%대로 올라섰다. 집단대출 역시 15개월 만에 2%대로 치솟았다. 대출금리가 1%포인트 상승할 경우 가계전체의 추가 이자 부담이 연간 9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한은으로써는 섣불리 금리 인상에 나서기는 어려운 입장이다.
하지만 미국 트럼프 신정부의 정책과 금리 인상 속도가 윤곽이 잡힐 동안 한은이 시간 벌기에 나섰다는 시각도 있다.
김성훈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은이 금리를 결정하는 데는 통상 국내사정이 더 크게 작용한다. 경기가 나쁘고, 가계부채가 심각해 시장에는 긴장하지 마라 신호를 준 셈이다”면서도 “다만, 시장이 얼마나 믿을지는 모르겠다. 미국이 상반기 1~2차례 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한은 역시 인상 기조를 따라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