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10월 1일 지미 카터- 냉전시대에 인권외교를 외친 미 39대 대통령

입력 2016-10-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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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편집위원

지미 카터(1924.10.1~) 하면 무엇보다 ‘인권 외교’가 떠오른다. 철저한 침례교 신자인 그는 외교 문제를 다룰 때도 예외 없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1970년대 후반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전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외교 문제를 정치·군사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카터의 인권외교 주창은 시대적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워터게이트 스캔들까지 터져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상황이었다. 이에 카터는 외교 정책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는다.

외교를 도덕적 차원에서 다루려는 카터가 우선 눈을 돌린 것은 중동평화였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분쟁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카터는 집요하게 매달렸고, 그 결과 중동 최초의 평화조약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이끌어낸다. 그는 또 “국제 관계에서 공정함이 기본”이라며 파나마운하 통제권을 파나마에 넘겨주고, “핵무기를 없애야 한다”며 구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을 체결한다.

하지만 카터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쟁과 같은 경험을 다시 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우월성까지 포기할 정도로 자비롭지 않았다. 그 우월성을 인권 외교라는 도덕적 이상으로 채우기에는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나마 운영권을 넘겨주자 미 보수주의자들은 카터를 “국익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대통령”으로 몰아간다. 전략무기제한협정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빛을 잃는다. 결정적으로 1979년 발생한 미 대사관 인질 구출 실패는 ‘미국=일등 국가’라고 믿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나약한 미국’이라는 좌절감을 안겨준다. 카터는 결국 레이건에게 패하고 레이건은 강한 미국을 외친다. 김대환 편집위원 daehoan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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