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8월 20일 계백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백제 장군

입력 2016-08-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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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 미래설계연구원 연구위원

“백제 장군 계백(607~660.8.20은 단 5000명의 결사대로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군사 5만 명과 대적하다 죽음을 맞았다는 점에서 ‘충절의 표상’으로 부를 만하다.”(아동문학가 박연아 ‘계백’)

그는 660년 당나라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 소정방이 지휘하는 수군 13만 명과 신라 대장군 김유신이 이끄는 육군 5만 명이 수륙 양면에서 백제를 침공했을 때 담솔이라는 관등(官等)을 갖고 있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대장군으로서 결사대 5000여 명을 뽑아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이때 그는 “한 나라의 군사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직접 식구들의 목숨을 거뒀다. 그리고 황산벌에 당도한 그는 병사들 앞에서 중국 월나라 왕 구천이 5000명의 군사로 오나라 대군 70만 명을 무찌른 일을 들며 “용기를 다해 싸워 국은에 보답하자”는 말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다.

백제군은 죽기 살기로 싸웠고 신라군과 4번 겨뤄 모두 승리했다. 신라군은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을 전투에 내보냈으나 죽었다. 반굴이 죽자 이번에는 좌장군 김품일의 열다섯 살 된 아들 관창을 보냈는데 관창도 붙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앳된 얼굴을 보고 돌려보냈으나 또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결국 관창을 죽였다. 어린 관창의 희생에 자극된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백제군과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그는 성충 흥수와 더불어 ‘백제의 3 충신’으로 평가된다. 충효를 국가 철학으로 삼은 조선 시대에는 그를 제향하는 서원도 다수 건립됐다. 소설가 유현종의 ‘계백의 혼’(1991), 소설가 이원호의 ‘계백’(1998) 등 그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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