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제 열 살 된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한국문학을 알아서, 또 그 소설이 유명한지를 알아서 찾아 읽은 것이 아니라 그때 중학교에 다니던 형 때문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둘째 형이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형이 어머니와 동생들 앞에서 중학교 책에 나온 ‘소나기’를 읽어주었다.
그때 대관령 아래에 있던 우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남폿불 아래 어머니는 해진 옷을 깁고, 형제들은 또 저마다 무언가 장난을 하고 있을 때 형이 건넌방에서 책을 꺼내 안방으로 건너와 일하는 어머니에게 그것을 읽어주었다.
어머니는 현대소설은 잘 읽지 않았지만 가을에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깎거나 길쌈을 할 때 동네 사람들과 함께 방에 둘러앉아 지난 초여름 단오 때 단오장에서 사온 ‘운영낭자전’이나 ‘능라도의 봄’ ‘이수일과 심순애’와 같은 얘기책을 즐겨 읽고, 또 읽는 것을 즐겨 들었다. 할아버지는 또 사랑에서 손주 한 명을 시켜 ‘삼국지’를 읽게 했다.
그래서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골마을이지만 도회지의 어느 집보다 독서를 많이 했고, 특히 낭독은 우리 집만의 독특한 문화일 정도로 할아버지에서부터 어린 손자들까지 자주 책을 읽고 또 읽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나는 처음 접한 ‘소나기’를 내 이야기처럼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형의 책꽂이에서 중학교 국어책을 꺼내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그리고 한 살 더 먹어 5학년이 되었을 때 더 많은 한국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와 형들이 읽는 책 말고는 집에 우리가 읽을 마땅한 책이 없기도 했지만 오영수 선생의 ‘고무신’ 같은 이야기는 먼저 읽은 ‘소나기’처럼 나도 읽을 만했다. 이후 김유정 선생의 ‘봄봄’이나 ‘동백꽃’ 같은 작품도 그걸 소설로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 어떤 집의 이야기처럼 읽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내가 제일 처음 읽은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도 그랬다. 두껍고 조금 무거운 주제의 소설이긴 하지만 내가 그 책을 읽는 방식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김유정의 ‘봄봄’이나 오영수의 ‘고무신’ 같은 작품을 읽을 때 주인공 얼굴에 우리 동네 사람들 얼굴을 대입해서 읽듯 ‘카인의 후예’ 역시 삼팔선 북쪽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동네의 이야기로 대입해 읽는 식이었다. 심훈의 ‘상록수’도 그런 방식으로 읽었다.
그 시절 나에게 잘 읽히지 않던 작품은 도회지 풍의 소설이었다. 마을에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오면 모두 뛰어나가 자동차 구경을 하는 대관령 아래 오지 산간마을 소년에게 전차 이야기나, 찻집 이야기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 이야기나, 버스정류장에 구두닦이가 등장하고 신문팔이 소년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마치 별세계와 같았다.
1930년대 같은 시대의 작품이어도 김유정의 작품은 읽는 즉시 바로 이해되고 서울을 배경으로 하여 쓴 이상의 작품은 1960년대 그것을 읽는 산골 소년에게는 오히려 30년 후에나 경험하게 될 신세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시골 소년에게 소설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