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영정과 어진과 존영과 사진

입력 2016-04-0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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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집안에 무슨 일만 있으면 집 뒤에 있는 조상님의 영당을 찾았다. 집안에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어도 할아버지는 그곳에 가서 아무 말이 없는 조상님께 집안의 일도 말씀드리고, 또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을지 의논하고 왔다. 그곳에 조상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그냥 위패만 모신 사당에 가서 말씀드리고 의논하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감이 있었을 것이다.

영당을 찾아 집안일을 말씀드리고 의논하는 것, 우리 눈에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마치 어떤 종교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어릴 때 집에서는 어른들이 가지고 노는 화투놀이를 못하게 하니까 몰래 그곳에 가서 화투놀이를 하다가 야단을 듣기도 했다. 할아버지로선 손자들이 불경을 저질러도 이런 불경이 없는 것이다.

그냥 위패만 모신 곳을 사당이라고 하고, 영정을 모신 사당을 영당이라고 부른다는 걸 그 시절에 알았다. 실제로 영당에 가면 처마에 ‘자호재영당’이라고 새긴 한자 목각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일가친척들에게도 늘 당당한 할아버지가 거기에만 가면 한없이 공손해졌다. 영정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어른이 되어 어떤 국책 금융기관의 홍보부서에서 오래 일을 한 적이 있다. 5공 때의 일인데 어느 해인가 사외보에 대통령의 연설문과 사진을 받아 실어야 했다. 보도지침이 내려지던 시절이고 국책기관들이야 위(?)에서 실으라면 실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연설문은 이미 밖으로 공개된 것이니까 그냥 받아 실어도 되지만, 대통령 사진은 그것을 관리하는 데서 받아 와 실어야 했다.

그 사진을 신청해 받아 와서 쓰고 반납하는 절차 또한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아마 공문에까지는 그렇게 쓰지 않았겠지만 사진을 내주는 곳에서도, 받아 와 쓰는 곳에서도 ‘어진’이라는 말을 했다. 사전적 의미로는 임금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나 사진을 말한다. 정말 같잖은 짓거리들이었다.

북한에서는 그걸 어진도 넘어서서 ‘태양상’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십수년 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북한 응원단이 왔었다. 그때 남북정상 회담 후 그곳 어디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함께 넣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이게 비를 맞자 북한 응원단이 눈물을 흘리며 현수막을 떼어 곱게 접어 가슴에 안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게 텔레비전에 나오자 사람들이 모두 저게 무슨 짓이냐고 했다.

그런 웃기고 같잖은 짓거리들이 며칠 전 대구에서 다시 벌어졌다.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이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자들에게 사무실에 걸어놓은 ‘대통령의 존영’을 반납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존영이라니. 지금 시절이 어느 시절인데 그런 말을 쓰는가.

어쩌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 존영의 주인을 가장 싫어하고 물 먹이려는 내부 안티들인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잖아도 그런 면에서 남북이 자꾸 비슷해져간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마당에 내부 안티들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문서로까지 그런 말을 써서 이다지도 남북이 똑같으냐는 소리를 다시 듣게 하는지 새누리당 차원에서는 한번 조사해볼 일이다.

책상은 책상이고, 사진은 사진이다. 아무리 받들어봐야 태양이 안 된다. 정신들 좀 차리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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