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한겨울 단상

입력 2016-01-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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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군의 기세에 한강도 몸을 잔뜩 움츠렸다. 여의도 주변 한강변이 얼어붙었고, 강 가운데로는 얼음 조각이 떠다니고 있다. 전철 차창 너머로 얼어붙은 한강을 바라보는데, 감정이 교차한다. 마음까지 얼어붙는 듯한 냉랭함에 휘감기는가 싶더니 이내 얼음판 위에서 뛰놀던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어릴 적 우리 집 바로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영하 20도를 넘나들던 강원도의 한겨울,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개울을 살폈다. 얼음이 잘 얼었는지를 확인해 친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개울이 꽁꽁 언 날에는 하얀 눈바람을 맞으며 썰매를 탔다.

부잣집 아들 기용이가 스케이트 날 두 개를 장착한 썰매와, 길고 단단한 철 꼬챙이를 갖고 나타나면 모두가 부러워했다. 이 빠진 부엌칼로 만든 썰매에 비해 기용이 썰매는 자동차로 말하면 ‘중형급’이었기 때문이다. 팔 힘이 센 종석이가 전력을 다해 달려도 기용이 썰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린 겨울방학 내내 얼음판을 쌩쌩 달렸다.

얼음판에 쓸린 바짓가랑이가 얼어서 뻣뻣해지면 뜨거운 아랫목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보일러가 돌아 집 안이 훈훈해지는 요즘, 가끔씩은 군불을 지펴 절절 끓던 온돌방이 무척이나 그립다. 뜨끈함보다는 아궁이 앞에서 군불을 때며 엄마와 정담을 나누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서이다.

‘군불’은 오로지 방안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때는 불이다. ‘군+불’의 형태로 ‘군’은 필요하지 않은, 쓸데없는 등의 의미를 안은 접두사다. 그러고 보니 우리 조상들은 객쩍게 불을 때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소죽을 쑤면서 방을 데웠다. 군불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만 지폈다. 군살, 군침, 군기침, 군것, 군글자 등도 같은 형태의 말로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접두사 ‘군’은 또 ‘가외로 더한’, ‘덧붙은’의 뜻도 더한다. 군식구는 원래 식구 외에 덧붙어서 얻어먹고 있는 식구(잡식구), 군사람은 정원 외의 필요 없는 사람이다.

“군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라는 속담이 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이것저것 많이 늘어놓으면 그만큼 쓸 말은 적어진다는 뜻이다. 하지 않아도 좋을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이 ‘군말’로, 이 속담은 한마디로 말을 삼가라는 의미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따르는 법, 말을 신중히 해야겠다.

한국인에게 가장 맛있는 밥은 뭐니 뭐니 해도 가마솥밥이다. 솥의 두께, 모양, 솥뚜껑의 무게 등이 비결이라지만 그보다는 아궁이 속 불에 달렸을 게다. 불의 세기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밥맛, 윤기, 찰기 등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아궁이에 나뭇가지, 솔가지, 검불 등을 넣어 불의 세기를 조절했다. 가마솥밥이 맛있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의 정성과 노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이 너무 세지도 않고 꺼지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붙어 있는 모양’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은 ‘꼬다케’이다.

군불 하면 외할머니가 그립고,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자리끼’가 떠오른다. 자리끼는 순 우리말로, 표준국어사전상의 의미는 ‘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하여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해 두는 물’이다. 그런데 자리끼가 필요했던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군불을 때 건조해진 방에서 침이 마르지 않도록 가습을 하는 역할이다. 추운 겨울밤 엄마는 외할머니께서 잠자리에 들면 머리맡에 자리끼를, 발 아래엔 요강을 두었다.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효(孝)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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