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貨殖具案(화식구안)] 국가부채 키우는 ‘가격파괴’ 경쟁

입력 2015-12-0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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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형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점점 1000원 한 장의 가치가 올라가는 느낌이다.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에서는 커피 한 잔 값보다도 싼 5000원짜리 옷들이 즐비하고,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은 커피도 1500원대에 팔리고 있다. 가게 입장에서는 손님들이 주머니의 1000원 한 장을 꺼내게 하기 위해 점점 더 치열한 할인전쟁으로 돌입한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세일’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지 않은 상점을 보기 힘들 정도다. 지하상가로 들어가 보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해, 심지어 옷이나 책, 과자 등도 아예 무게를 달아 g당 얼마씩으로 판매하는 가게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가격파괴’라는 단어가 어느덧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해져 가는 느낌이다.

이러한 현상이 값싼 소비재에 국한된 문제라고? 그러면 사치스러운 소비재의 대표 격인 골프장을 한번 보자. 수도권의 웬만한 골프장들은 이제 토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회원권 없이도 얼마든지 골프를 즐길 수 있다. 그뿐인가? 아침식사 및 간식까지 제공하는 골프장이 생겨나는가 하면, 라운딩 중간에 시원한 맥주 또는 아이스크림까지 제공하고도 가격은 과거의 절반대인 10만원 초반 수준이다. 이쯤 되면 가히 소비자가 왕으로 대접받는 느낌이다.

그러나 입장을 한번 바꾸어 생각해 보자. 1000원짜리 한 장을 손님으로부터 받아내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하는 가게들은 어떻겠는가? 프랜차이즈 형태가 대부분인 치킨점이나 커피점, 그리고 음식점 등은 프랜차이즈 사용료를 내고 나면 이런 저물가 시대에서는 수익을 낼 방법이 없다.

과거 인플레 시대, 회원권을 남발하여 모은 자금으로 골프장을 짓고 난 뒤, 입회금 반환요구가 들어오자 갚을 길이 전무해진 골프장으로서는 훨씬 더 좋은 조건, 예컨대 4인 무기명 등의 파격적 조건으로 회원권을 교환해 주면서 추가적으로 가격 인하까지 하게 되니 경영이 제대로 될 턱이 있겠는가? 고용은커녕 해고를 해야 하는 입장이며, 이러한 심각한 상황은 대기업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통계치를 한번 살펴보자. 올해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어떠한가? ‘11월 소비자물가 동향’을 보면, 전년 동기 대비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12월 0.8%로 낮아진 뒤 10월(0.9%)까지 11개월째 0%대가 이어지다가 11월에는 1.0%로 소폭 올랐다. 비록 12월이 남아 있지만 올해의 물가 평균은 대략 0.7%로 집계된다. 사상 초유의 0%대 물가를 겪게 되는 셈이다. 고작 0.7%대 물가도 따지고 보면 담뱃값 인상 효과가 있으므로, 이 효과(0.58%포인트)를 제외하면 실질적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충격적인 0.12%에 그치게 된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추세라는 점이다. 2011년 4.0%의 물가상승률이 2012년엔 2.2%, 2013년 1.3%, 2014년 1.3%를 거쳐 올해는 1%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를 비교해 보자면 일본은 1992년 물가상승률 1.7%, 1993년 1.3%로 1%대의 물가를 유지하다가 1994년에 0.7%로 1%를 밑도는 물가를 처음 기록한 이후 1995년 -0.1%라는 마이너스 물가를 기점으로 기나긴 불황의 터널로 접어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올 8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물가상승률 외, 우리나라의 명목성장률 추세도 일본과 놀랍도록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악화해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의 국가부채의 절반 정도는 일본의 인플레율이 2%대만 유지하였더라도 발생되지 않았을 것으로 KDI는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올해 1~9월 관리재정수지가 46조3000억 원 적자를 기록, 1990년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이후 역대 최대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저물가가 본격적인 세수 감소 및 그에 따른 국가부채 증가의 악순환으로 접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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