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내가 생각하는 소설쓰기

입력 2015-11-0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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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누구나 가끔 자기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있을 것이다. 최근 나의 직업과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란 과연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 나는 직업이 소설가인데도 학교 다닐 때든 학교를 졸업한 다음이든 이제까지 어떤 형태로든 ‘소설론’이라는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나서 그냥 열심히 소설을 읽고 또 열심히 쓰기만 해 왔지, 내가 쓰는 소설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따로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마도 소설론도 공부하고 문장론도 공부하고 그래야지만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소설가가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한 편의 잘 짜인 이야기가 소설이 아닐까,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다.

소설을 쓰든 무얼 하든 다 자기 직성에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나는 그런 내 직성 때문에라도 가능하면 내 작품을 좀 다양하게 가져가고 싶다. 한 작가의 소설을 모아 놓았을 때 똑같은 틀로 찍어내는 국화빵처럼 이 얘기가 그 얘기 같고, 그 얘기가 이 얘기 같은 정도가 되면 나는 더 이상 소설 안 쓰고 내가 지금도 꼭 하고 싶어 하는 일로, 대관령으로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지으러 떠날 것이다. 서로 비슷하고 고만고만한 이야기를 써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배추가 저 배추 같고 저 배추가 이 배추 같은 배추밭을 둘러보는 것이 훨씬 내 직성에 맞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그렇고 학문에 대해서도 그렇고 우리가 그릇되게 알고 있는 편견 한 가지가 있다. 한 우물을 파야지만 반드시 깊이 파지고 물이 나오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사람이 한 주제에만 매달린다고 그 주제가 저절로, 그리고 반드시 깊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경 5미터의 우물을 파 내려가는 것과 직경 10미터의 우물을 파 내려가는 것을 생각해 보자.

작품들은 저마다 세계를 갖고 있다. 똑같은 우물 똑같은 세계를 연속으로 그린다고 그 세계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물이 저마다의 깊이를 가지듯 작품도 저마다의 깊이와 저마다의 물맛을 갖는다. 한 우물만, 혹은 같은 우물만 파는 것이 내 몫이어야 한다면 나는 진작에 내가 넘어왔던 대관령을 되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일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할 것이고 의미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그러니까 소설을 쓰는 일을 건축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일이 곧 글로 집을 짓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집이란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데가 아닌가. 살지는 못하고 그냥 둘러보기만 할지라도 나는 그 안에 사람이 사는 냄새와 살았던 냄새가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독자들에게 자기 글에 대해 바라는 것이 있다. 나도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글로 지은 집들이 그것을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따뜻했으면 좋겠다. 어떤 집들은 일부러 구들도 놓지 않고 온기들을 싹 뽑아버리기도 했는데, 그런 집 앞에서는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나는 열심히 이런저런 여러 형태의 집들을 지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한 세상 살아가며 하고 싶은 다른 어떤 일들도 그만두게 하고 오직 소설만 쓰게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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