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소설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나서 그냥 열심히 소설을 읽고 또 열심히 쓰기만 해 왔지, 내가 쓰는 소설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따로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마도 소설론도 공부하고 문장론도 공부하고 그래야지만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면 나는 애초에 소설가가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한 편의 잘 짜인 이야기가 소설이 아닐까,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다.
소설을 쓰든 무얼 하든 다 자기 직성에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나는 그런 내 직성 때문에라도 가능하면 내 작품을 좀 다양하게 가져가고 싶다. 한 작가의 소설을 모아 놓았을 때 똑같은 틀로 찍어내는 국화빵처럼 이 얘기가 그 얘기 같고, 그 얘기가 이 얘기 같은 정도가 되면 나는 더 이상 소설 안 쓰고 내가 지금도 꼭 하고 싶어 하는 일로, 대관령으로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지으러 떠날 것이다. 서로 비슷하고 고만고만한 이야기를 써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배추가 저 배추 같고 저 배추가 이 배추 같은 배추밭을 둘러보는 것이 훨씬 내 직성에 맞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그렇고 학문에 대해서도 그렇고 우리가 그릇되게 알고 있는 편견 한 가지가 있다. 한 우물을 파야지만 반드시 깊이 파지고 물이 나오는 줄 알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사람이 한 주제에만 매달린다고 그 주제가 저절로, 그리고 반드시 깊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경 5미터의 우물을 파 내려가는 것과 직경 10미터의 우물을 파 내려가는 것을 생각해 보자.
작품들은 저마다 세계를 갖고 있다. 똑같은 우물 똑같은 세계를 연속으로 그린다고 그 세계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물이 저마다의 깊이를 가지듯 작품도 저마다의 깊이와 저마다의 물맛을 갖는다. 한 우물만, 혹은 같은 우물만 파는 것이 내 몫이어야 한다면 나는 진작에 내가 넘어왔던 대관령을 되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일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할 것이고 의미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그러니까 소설을 쓰는 일을 건축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일이 곧 글로 집을 짓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집이란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데가 아닌가. 살지는 못하고 그냥 둘러보기만 할지라도 나는 그 안에 사람이 사는 냄새와 살았던 냄새가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작가라면 누구나 독자들에게 자기 글에 대해 바라는 것이 있다. 나도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글로 지은 집들이 그것을 둘러보는 사람들에게 따뜻했으면 좋겠다. 어떤 집들은 일부러 구들도 놓지 않고 온기들을 싹 뽑아버리기도 했는데, 그런 집 앞에서는 따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나는 열심히 이런저런 여러 형태의 집들을 지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한 세상 살아가며 하고 싶은 다른 어떤 일들도 그만두게 하고 오직 소설만 쓰게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