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추석 성묘를 다녀와서

입력 2015-10-02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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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다른 어떤 곡식보다 쌀이 귀하던 시절, 시장에 나오는 모든 물건값의 척도가 쌀이었다. 북어 한 쾌(20마리)의 값도 쌀로 정하고, 일꾼들의 하루 품삯과 일 년 새경도 쌀로 정했다. 그런 시절엔 일부러 밭을 일구어 논을 만들기도 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모를 심는 천수답의 경우도 처음엔 산을 깎아 밭을 만들고 그걸 다시 논으로 만든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심을 수 없는데도 굳이 그걸 논으로 만든 이유도 다른 어떤 곡식보다 쌀이 귀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런 쌀이 가장 흔해 시장에 나가도 쌀보다 값이 싼 곡식을 찾기 어렵다.

명절에 시골에 가도 큰길 옆의 논밭은 작물을 재배해도 큰길에서 좀 떨어져 산소 가는 길 옆의 논밭들은 그대로 묵은 곳이 많이 보였다. 쌀이 귀하던 시절 할아버지도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도 농사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쌀농사와 온 산 가득 밤나무를 심어 집안을 일으켰고, 아버지 역시 농사로 다섯 자식의 대학을 가르쳤다. 힘들어도 그래도 농사가 조금이나마 제대로 대접을 받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을 자식은 없었다. 쌀이 가장 흔한 곡식이 된 다음에도 아버지는 오래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연세가 들고 힘에 부쳐 마을 길 옆의 논을 그냥 묵힐 수가 없어서 누가 농사를 지을 사람이 있으면 지으라고 동네에 말했다. 집안에 트랙터와 각종 농기계를 가지고 마을에서 제법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아저씨가 짓겠다고 나섰다. 아버지는 논이 묵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산길 옆의 밭은 누가 짓겠다는 사람이 없어 그냥 묵힐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걸 부끄럽게 여겼다.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오던 땅에 농사를 짓지 않고 묵히는 것, 이제 세월이 바뀌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아버지는 그 밭이 잡초밭이 되고, 서서히 관목이 밭에 뿌리내리는 걸 부끄러워했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아버지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런 것이었다. 자식이 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때, 그리고 다른 논밭의 곡식은 다 제대로 자랐는데 내 논밭에만 제대로 곡식을 심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부끄럽다고 했다.

등이 휘게 일을 해서 자식을 키웠고, 그렇게 키운 자식들 대부분 부모보다 많이 배우고, 또 어머니보다 많이 배운 며느리를 집안에 들였다. 텃밭에 키운 작물도 좋은 것은 자식들에게 보내고, 어머니 아버지 차지는 언제나 제일 못난 것들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도 제일 좋은 작물은 시장에 내다 팔아서 자식들의 학비를 댔다.

집에서 신는 양말 한 가지를 보더라도 그랬다. 살아 계실 때 평소 집에서 아버지가 신는 양말은 시골집에 들른 아들들이 벗어놓고 간 것들이었다. 때로 새 양말도 짝짝이로 신고 계실 때가 있었다. 눈이 침침해 같은 색의 연함과 짙음도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차림으로 외출하실 때도 있었다. “짝짝이 양말을 신고 나갔다 오신 거예요?”라고 물으면 내가 지은 작물이 밭에서 그냥 쓰러지고, 내가 낳은 자식이 제대로 사람값을 못할 때 부끄러운 거지 그런 것은 창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 것이 바로 인생의 가르침이라는 걸 자식들은 보모님 살아생전에는 잘 모른다. 자식은 추석 명절에 성묘를 다녀오며 비로소 그런 희생과 검약으로 오늘에 내가 있구나,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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