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무렵 옷과 책을 말리던 풍속
[하루 한 생각] 8월 23일 陰乾曝書(음건폭서)
처서 무렵 옷과 책을 말리던 풍속
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23일은 처서(處暑). 예전에는 여름내 장마에 젖었던 옷과 책을 말리는 음건(陰乾)이나 폭서(曝書)를 했다. ‘동국세시기’등 많은 문헌이 이런 것을 칠석의 풍습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무렵부터 처서까지가 햇볕이 좋고 순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서에는 왕의 방학도 끝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1527) 7월 11일의 기록을 보자. 신하들이 이제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재촉하자 중종은 이렇게 말한다. “창덕궁은 비습하고 협착하므로 우선 여기에서 피서하는 것이다. 처서가 지나면 경연(經筵)도 열고 일도 보게 될 것이니 마땅히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할 것이다.” 비습(卑濕)은 바닥이 낮고 습기가 많다는 뜻이며 협착(狹窄)은 자리가 몹시 좁다는 뜻이다.
이틀 후엔 이렇게 말한다. “처서까지는 창경궁에 있었지만 이즈음 대신들의 말 때문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12년 후인 1539년 7월 11일엔 이런 말을 했다. “근래 오래도록 경연을 폐해 군신을 접견하지 못했다. 지금 날씨를 보니 처서가 이미 지났는데도 더위는 아직 물러나지 않고 답답하고 찌는 듯하여 경연은 열 수 없을 것 같다.” 이 해에는 더위가 몹시 오래 갔나 보다.
원래 초복부터 처서까지 40일가량이 왕의 방학(7월 13일자 ‘하루 한 생각’ 참조)이었는데, 때로는 더위 때문에 그 기간이 더 길어지기도 한 것 같다.
연산군 11년(1505) 7월 14일에는 연산군이 처서(處暑)를 조서(徂暑)로 바꿔 쓰라고 한 기록이 나온다. 환관 김처선(金處善)이 왕의 음란한 행각을 꾸짖자 연산군은 다리와 혀를 잘라 죽인 것도 모자라 처선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에게 개명을 명령하고, 모든 공문서에 처(處)와 선(善)을 쓰지 못하게 했다. 徂는 갈 조, 나아갈 조로 읽는다. 조년(徂年)은 왕년(往年)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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