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1960년대만 해도 이 시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시대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고통과 역경을 이기며 장래를 기약하는 자세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 같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은 26세에 과거 급제해 벼슬을 살았으나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돼 21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한 사람이다. 나중에 부제학까지 올랐지만 얼마나 괴로움이 컸으랴. 그의 시 ‘침상에서 즉흥적으로 읊다’[枕上口占]에 고진감래가 나온다. “남북 바다에서 객지생활 몇 해던가/고진감래 끝에 이제 궁함만 얻었네/벼슬 던지고 돌아가 예쁜 황국을 찾고/친구된 자 멀리 푸른 하늘의 기러기 가리키네/궁궐에선 옷과 버선으로 벗을 기리고/ 사방의 시내와 산들은 주인을 껴안네/새 시렁엔 또 오천 권의 책 가득하니/이제부터 지극한 낙 끝없이 보여주리”[南溟北海幾萍蓬 苦盡甘來獲此窮 投紱歸尋黃艶菊 契心遙指碧霄鴻 九重衣襪褒賓友 四面溪山拱主翁 新架又盈五千卷 從今至樂示無窮]
미암은 1567년 10월 1일부터 사망하던 해인 1577년 5월 13일까지 일기(보물 260호)를 썼다. 일기에는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 여러 지역에서 조사한 측우기 우량(雨量) 기록이 자세하게 나온다. 고진감래의 반대는 흥진비래(興盡悲來)인데,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니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