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남오세티야 병합 ‘21세기 신냉전’ 촉발… 中·터키와 관계 개선 실리외교로 위기돌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신냉전시대의 한가운데 있다. 신냉전의 시작은 우크라이나다. 지난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정부에 대한 대규모 항의 시위에 이어 지난해 초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되고 같은 해 3월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되는 등 격변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냉전의 그림자를 느끼게 됐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전 세계가 신냉전 직전에 있으며 일각에서는 이미 시작됐다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 등 서방국들이 베릴린 장벽 붕괴 이후 승리주의에 도취했다”며 “러시아가 약해지고 견제 세력이 없는 것을 틈타 세계에 대한 독점적 리더십을 추구했다”고 푸틴을 옹호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공세적이고 고압적인 외교정책이 신냉전의 가장 큰 원인은 분명하다는 평가다. 옛 소련의 영향력에 향수를 느끼는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강경노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조지아(옛 그루지아)와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 위성국가에 무력을 행사해 왔다. 지난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당일 조지아 공격을 지시했다. 그 결과 러시아계 주민이 대다수인 남오세티야가 조지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러시아는 올해 3월 남오세티야 군사와 경제 부문을 러시아에 편입한다는 내용의 ‘동맹과 통합’ 조약을 체결해 크림반도에 이어 사실살 남오세티야도 병합하게 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독일, 프랑스 등 4개국이 지난 2월 휴전 협상을 맺어 우크라이나 사태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크림에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도 러시아의 사실적 지배하에 있게 됐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러시아 주요 고위층의 입국을 금지하고 이들과 주요 국영기업의 자산을 동결하는 등 고강도 제재를 펼치고 있지만 약발도 떨어져 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전망에서 러시아가 올해 경제성장률이 -3.4%로 위축되고 나서 내년에는 0.2%로 회복될 것으로 내다봤다. 서구의 경제 제재와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 폭락에 따른 인플레이션, 국제유가 하락 등 온갖 악재를 견디고 러시아 경제가 다시 일어설 것으로 본 것이다. 러시아의 지난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9%로 6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지만 시장 전망인 -2.0~-4.5%는 웃돌았다. 미국 달러화당 루블화 가치는 지난해 12월 80루블 선까지 추락했지만 현재는 50루블 선으로 올랐다.
IMF는 “러시아 정부의 정책과 위기대응 수단의 결합으로 루블화 가치와 경제가 안정을 찾고 있다”며 푸틴 정부의 대처능력에 감탄을 표시하기도 했다. IMF는 러시아의 물가상승률도 현재 약 16.0%에서 연말엔 12.5%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달 열린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식에 서구 정상들이 불참한 것처럼 고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러시아는 돌파구도 모색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5월 중국에 오는 2018년부터 앞으로 30년간 약 4000억 달러(약 436조원)에 이르는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협상은 10여년간 가격 문제로 난항을 겪었으나 신냉전 시대 중국과의 밀월관계를 강화하고자 푸틴이 결단을 내렸다고 외교 소식통들은 전했다. 러시아는 또 오는 2019년부터 우크라이나 가스관 사용을 중단하는 대신 러시아 남부에서 흑해를 거쳐 터키와 그리스로 연결되는 ‘터키 스트림’에 초점을 맞추는 등 터키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있다.
푸틴의 측근인 세르게이 나리슈킨 러시아 하원의장은 지난 21일(현지시간) 도쿄를 방문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회담하고 대러시아 제재 해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와 국제유가 등 지정학적 변수는 여전하고 신냉전이 조기에 종료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어서 러시아 위기가 끝나 간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지적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이달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에스토니아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은 우크라이나에 이은 다음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해 서유럽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오는 6월 13일 발트해의 스웨덴 해역에서 벌어지는 군사훈련에서 ‘B-52’를 동원한다.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B-52는 과거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전략 폭격기로, 이 기종을 훈련에 동원한 것은 러시아를 겨냥한 무력시위인 셈이다.
서구 경제 제재와 유가하락 여파로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도 지난 2013년 말 5000억 달러에서 현재 3600억 달러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자국이 올해 갚아야 할 정부 부채가 1425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약 7%에 이르는 수치다.
러시아 모스크바 소재 컨설팅업체 매크로어드바이저리의 크리스 위퍼 선임 파트너는 “러시아엔 현재 빚을 충분히 갚을 외환보유고가 있다. 하지만 빚을 갚을 경우 에너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줄이는 데 필요한 인프라 투자에 쓸 돈이 고갈된다”며 “또 기술 수입에 대한 서구의 제재는 러시아 산업의 현대화를 막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12일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휴전 협정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보이기 전까지 제재는 해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외교 소식통들은 이에 대해 러시아 제재가 올해 안에 풀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