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전세를 살고 있는 직장인 박모(35)씨는 다음달 계약 만기를 앞두고 전세 대신 보증부 월세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매매가를 위협하는 수준이 되자 2년 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어서다.
박 씨는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80∼90%에 이르다보니 나중에 전셋값이 떨어지거나 집값이 하락하면 전세보증금을 제 때 돌려받지 못하는 등 낭패가 우려된다"며 "봉급생활자 입장에서 월세가 부담이 되고, 생돈이라 아깝기도 하지만 나중에 이사갈 때를 생각하면 차라리 보증금을 적정 수준으로 낮춰놓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연초부터 전세난이 심화되면서 주택 임대시장에 '자발적 월세'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
최근 전셋값 급등으로 보증금 올려줄 돈이 부족해 월세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셋값이나 집값 하락 등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역전세난'에 대비해 월세로 돌아서는 것이다.
강동구 고덕동 아이파크 113㎡짜리 한 아파트는 지난달 보증금 4억3천만원, 월세 50만원에 임대계약이 체결됐다.
당시 전셋값은 5억5천만원으로 보증금을 뺀 1억2천만원을 연 5%의 월세로 내는 조건이다.
이 세입자가 보증부 월세를 택한 이유는 '리스크 관리'였다.
18일 고덕동 실로암공인 양원규 대표는 "최근 전세난에도 불구하고 보증부 월세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 세입자는 선뜻 계약하겠다고 나서서 놀랐다"며 "보증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전세난이 두려워 차라리 월세를 내겠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양 대표는 "최근 전세가율이 82∼83%까지 오르자 2년 뒤 전셋값이 떨어지거나 집값이 내리면 과거처럼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며 걱정을 했다"며 "보통의 세입자들은 대부분 전세를 선호하고, 부족한 보증금은 월세로 주는 대신 연 2∼3% 이자의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올려주는 게 일반적인데 다소 의외였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전세가율이 80∼90%대에 이르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성북구 종암동의 한 중개업소 사장은 "전셋값이 매매가격에 육박하다보니 세입자들이 전세계약을 하면서도 집값 하락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한다"며 "아직은 전세 선호가 강하지만 일부 세입자는 전세금을 올려줄 능력이 되는데도 인상분을 월세로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전세난이 심한 곳은 중개업소끼리 해오던 '공동중개'도 사라졌다.
송파구 잠실동 잠실박사 박준 대표는 "과거에는 공동거래중개망에 전세물건을 올려놓으면 A중개업소가 집주인을, B업소는 세입자를 맞춰 계약을 체결했는데 지금은 전세물건을 중개망에 올리지도 않는다"며 "전세물건 자체가 귀한데다 개별 업소의 대기 수요만으로도 충당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동구 고덕동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어쩌다 전세 물건이 나오면 집주인과 세입자 양쪽에서 중개수수료를 받기 위해 물건 공유와 공동중개를 꺼리는 분위기"라며 "세입자들은 전세물건을 보유한 중개업소를 찾기 위해 과거보다 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평일 '넥타이 부대'들의 전세 구하기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마포구 공덕동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보통은 주말에 부부동반으로 전세를 구하러 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워낙 전세가 없다보니 요즘은 평일, 주말이 따로 없다"며 "주말까지 기다리다간 물건을 뺏긴다는 불안감에 평일에 정장을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전셋집을 미리 구하러 다니는 '입도선매' 시기는 점점 빨라지는 추세다.
통상 계약만기 3∼4개월 전부터 전세를 구하러 다녔다면, 요즘은 전세만기가 6개월 이상 남았는데도 중개업소에 들러 동향 파악에 나선다는 것이다.
국민은행 박원갑 수석 부동산전문위원은 "올해 10월에 전세계약이 끝나는 한 세입자가 지금부터 전세를 알아보고 다닌다고 해서 놀랐다"며 "전세가율이 매월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전·월세 시장에 종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들이 많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