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맹자는 ‘맹자’ 이루(離婁) 하편에서 “문왕은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처럼 여겼고, 도를 열망하기를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고 말했다. 이어 “무왕(武王)은 가까운 사람이라 하여 함부로 흘려 버리지 않고 먼 사람이라도 잊지 않았다”고 평했다.
춘추좌씨전 애공(哀公) 원년편에는 시민여상의 뜻이 더 소상하게 나온다. 진(陳)나라의 봉활(逢滑)이라는 신하가 회공(懷公)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나라가 흥성할 때 백성을 아픈 사람처럼 여기니 이것은 그 나라의 복이요, 망할 때 백성을 지푸라기처럼 여기니 이것은 그 나라의 화입니다.”[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보느냐 지푸라기처럼 여기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목민관은 백성을 사랑하는, 이른바 애휼정치(愛恤政治)에 더욱 힘써야 한다”며 “백성을 다친 사람 돌보듯 하라”[視民如傷]고 말했다. “노인을 받들어 돌보는 예절이 없어지면 백성들은 효심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養老之禮廢 而民不興孝], “옛날의 어진 목민관들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구휼할 정책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古之賢牧 於此慈幼之政 靡不單心]는 것이다.
북송의 유학자 정호(程顥)는 수령으로 부임하는 곳에 ‘視民如傷’ 네 글자를 써 놓고 일을 해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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