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재테크가 필요없는 사회

입력 2014-12-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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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장

국내에서 재테크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삶의 기반을 이루는 많은 것들이 흔들리고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많은 실업자가 생겨났고 고용불안이 극심해졌다. 반면 사교육비가 치솟고 부동산 투기로 부채 이자 부담이 느는 등 가계지출이 크게 늘었다. 이처럼 고용은 악화되고 지출은 늘고 수명 증가로 노후는 길어지는데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는 상황에 사람들은 직면했다. 유럽과 같은 사회 안전망과 복지 인프라도 없고, 미국처럼 활발한 산업 생태계도 없어 해고되면 바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상태가 됐다. 과거 일본식 종신고용을 흉내내던 시절도 외환위기 이후 끝나버렸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지자 이혼과 자살률이 급증하는 한편 가족간 유대도 빠르게 허물어졌다.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열심히 일만 해서는 생계를 꾸릴 수도, 편안한 노후를 기대할 수도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인식은 재테크 열풍으로 이어졌다. 외환위기 직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에 불어닥친 닷컴 열풍은 재테크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모두가 ‘부자 아빠’가 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앞다퉈 투자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소위 대박 신화는 주식으로, 부동산으로, 금으로, 펀드로 다양하게 이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재테크 광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처럼 무분별한 재테크 열풍이 불게 된 데에는 정부와 금융권 등의 책임이 크다.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불안해진 사람들의 삶을 안정되게 하는 정책과 제도를 시행하기는커녕 계속 재벌과 국제자본의 이익과 논리에 휘둘려 사람들을 무한경쟁에 시달리게 했다. 이와 함께 외국자본에 속속 넘어간 시중은행들을 중심으로 한 금융권 및 건설업계, 부동산, 언론들이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가계들에게 탐욕과 공포를 조장하면서 재테크 전선에 뛰어들게 했다. 이에 따라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돈 따먹기 투쟁’이 일상화된 사회가 됐다.

그런데 과연 이런 재테크 열풍은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 주었을까? 물론 누군가는 운 좋게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어떤가. 많은 이들이 2000년대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었고 상당수가 부동산 부자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빚더미에 앉았고 하우스푸어로 전락했다. 주식시장에도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이 뛰어들었지만 십중팔구는 손해를 보거나 본전치기 정도에 그쳤다. 더 이상 주식시장에서 개인들이 돈을 벌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최근 몇 년 새 빠른 속도로 개인들이 주식시장을 떠나고 있다.

이제 과거와 같은 재테크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우리의 주머니를 노리는 가짜 정보와 대박 환상에서 벗어나서 다시 착실하게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좋은 재테크라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투자를 하더라도 대박 환상은 버려야 한다. 투자를 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을 보상하거나 은행 이자보다 1~2% 정도 높은 수준을 적정 수준으로 생각한다면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반면 그 이상을 노린다면 투기 심리에 빠지게 되고 가짜 정보에 속아서 낭패를 볼 위험이 크게 높아진다.

정부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동안 정부는 일반가계보다는 건설업체나 금융권과 유착해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재테크를 조장하고 빚 권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일반 저축 상품에서 얻는 이자 소득에는 꼬박꼬박 세금을 매기면서도 투자 상품에는 세금을 면제하고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이유로 부동산 관련 세금을 깎거나 없애는 정책이 그 대표적인 예다. 부동산시장이나 주식시장은 침체되면 정부가 앞장서서 부양책을 내놓으면서,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가계 저축률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정부 정책이 과연 정상인가.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는 사람들이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고용 안정성을 키우고 사회 안전망과 복지 인프라를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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