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업 조건이 2000억달러 후속 투자 기준…속도보다 국익에 무게

이 대통령은 1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대미투자 협상에 대해 “거의 합의가 됐다고 하는데 제가 내용을 보니까 동의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이 좀 있었다”며 “다시 얘기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17일 국회 보고 일정을 연기했고, 이에 따라 이날 예정됐던 대미투자 1호 사업 양해각서(MOU) 체결과 프로젝트 발표도 미뤄졌다. 당시 구체적인 연기 배경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으로 실무 협상에서 마련한 안의 일부 조건이 최종 검토 과정에서 재협상 대상이 됐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이번에 협상 중인 것은 한미 관세협상에서 합의한 3500억 달러 규모 대미투자 패키지 전체가 아니다. 3500억 달러 가운데 정부가 주도하는 2000억 달러 규모 투자기금에서 집행할 첫 번째 프로젝트다. 나머지 1500억 달러는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 관련 금융지원으로 구성된다.
1호 사업의 의미는 개별 프로젝트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첫 사업에서 정해지는 투자금 회수 방식과 수익·손실 배분, 사업 의사결정 구조가 남은 2000억 달러 투자 사업의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계약에서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면 후속 사업에서도 이를 바꾸기 어려울 수 있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기준은 ‘상업적 합리성’이다. 정부는 한미 관세협상 당시 투자 사업이 경제성과 수익성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의 상업적 합리성을 합의문에 포함했다. 이 대통령은 이 표현을 넣기 위해 두 번째 한미 정상회담 직전까지 협상이 이어졌다며 “다른 나라에는 없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원칙을 합의문에 담는 것과 개별 사업에서 투자 안전장치를 확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실제 투자에 앞서 사업별 수익성과 원금 회수 가능성, 손실 발생 때 부담 주체를 구체적으로 확정해야 한다.
이 대통령도 “구체적인 투자 협의를 시작하니 그게 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며 “어떻게 회수할 것인지, 수익 배분은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지, 손실이 발생하는 사업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쟁점으로 꼽았다. 한국이 자금만 부담하고 사업 운영이나 수익 배분 과정에서 충분한 권한을 확보하지 못하는 구조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1호 사업으로는 미국 텍사스 가스복합화력발전소가 유력하게 검토돼 왔다. 이 사업은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구매할 수요처의 장기 보증 여부가 쟁점으로 알려졌다. 안정적인 전력 판매처가 확보되지 않으면 수익 창출은 물론 투자금 회수도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 내 원전 건설도 대미투자 협상의 주요 변수다. 한미는 미국에 건설할 대형 원전 8기 가운데 6기는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2기는 한국형 APR1400으로 구성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웨스팅하우스가 자국 내 APR1400 건설에 난색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웨스팅하우스에 대한 지분과 의결권 문제도 맞물려 있다. 한국은 해외 원전 수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분과 이사회 참여 등 실질적인 권한을 요구해 왔다. 미국 측은 의결권 없는 소수 지분 참여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 규모에 걸맞은 사업 참여 권한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쟁점인 셈이다.
미국 측이 제안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사업과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의 투자 대상 포함 여부도 조율 대상이다. 이들 사업이 추가되면 2000억 달러 한도 안에서 사업별 투자 규모와 우선순위를 다시 정해야 한다.
첫 투자금의 규모와 송금 시점도 협상 변수로 거론된다. 정부는 이달 22억 달러 이상을 먼저 송금하고 내년부터 연간 최대 200억 달러 한도에서 투자금을 집행하는 방안을 검토해 왔다. 그러나 미국 측이 올해 안에 약 100억 달러를 먼저 송금하라고 요구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투자 대상과 회수 구조가 확정되기 전에 거액을 송금하면 한국 측의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다.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투자 성과를 조기에 보여주려는 미국과 사업성을 먼저 확인하려는 한국의 이해가 엇갈리는 지점이다.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국익이 훼손되지 않고 한미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사업을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우려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대미투자 약속을 이행하되 투자 규모나 발표 속도보다 사업의 수익성과 회수 가능성을 우선하겠다는 메시지다.
국회 보고 일정은 21∼22일로 다시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이 상당 부분 진척된 만큼 1호 사업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보다는 투자 조건을 보완한 뒤 발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수익·손실 배분과 투자금 회수 장치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일정이 더 늦어질 수 있다.
이번 재협상의 핵심은 대미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약속을 뒤집는 데 있지 않다. 2000억 달러 투자기금의 첫 사업에서 상업적 합리성을 실제 계약으로 구현하는 데 있다. 1호 사업의 조건이 후속 투자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만큼 조기 발표보다 투자금 회수와 의사결정권을 보장할 구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