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숫자, 57개든 80~120개든 대화 시급성 보여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를 57개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당장의 완전한 비핵화가 어렵더라도 상황 악화 방지 및 위기 관리를 위한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부각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북한이 핵 프로그램 제한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볼 만한 신호는 아직 없다는 신중론도 제기됐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북한 담당 국가정보관을 지낸 시드니 사일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비상근 선임고문은 20일(현지시간) 본지와 서면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핵무기 57개 보유 발언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라는 목표가 당장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실질적인 위협이므로 북한과의 외교에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관계를 개선할 명분을 제공한다”며 “단기적으로는 상황 악화 방지 및 위기 관리에 도움이 되며 장기적으로는 비핵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핵무기의 정확한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김 위원장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사일러 고문은 '북한 핵무기 57개'가 미국 정보 당국의 최신 평가를 반영한 수치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그는 미국 국가정보국장실(ODNI)이 매년 발표하는 연례위협평가를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준으로 꼽으며 “최근 보고서부터 살펴보면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의 구체적인 숫자는 거론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정보당국의 공식 공개 평가에 등장하지 않았던 구체적인 숫자가 제시된 만큼, 이를 향후 군비통제 협상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나올 수 있다고 봤다. 사일러 고문은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잠재적인 군비통제 협상의 출발점을 제시하려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질문은 김정은이 스스로 몇 개의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가 밝힌 북한 핵무기 규모에 대한 격차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앞서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언급한 북한 핵무기 80∼120개와 트럼프 대통령의 57개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 “각각의 숫자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평할 수 없다”면서도 “어느 쪽이든 이 범위에 해당한다면 대화를 추진해야 할 중요성과 시급성을 보여준다”고 답했다.
사일러 고문은 북한 핵 무력 증강으로 김 위원장의 협상 입지가 2018∼2019년 북미 정상외교 당시보다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평가에도 선을 그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며 “애초 김정은이 2018∼2019년 외교에 진지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약 8년간 벌어진 어떤 일도 그 사실을 바꾸지 못했다”며 “우리는 2018년과 그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확고하고 꾸준하며 과감하고 자신감 있게 억지 태세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향후 북미 협상이 비핵화 대신 핵 군축이나 위험 감소, 핵무기 수량 제한으로 전환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사일러 고문은 ‘향후 북미 협상이 북한을 공식적으로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군비 통제, 위험 감소,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 제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냐’는 물음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을 담은 질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아직까지 군비 통제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옹호자나 논평가 중 미국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고집하지 않는다고 해서 김정은이 핵 프로그램 제한을 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어 “김정은의 태도 변화에 대한 신호를 주시해야 하며 탐색하고 장려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일러 고문은 미국 정보·외교·안보 분야에서 40년 넘게 한반도 문제를 다뤄온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다.
2020∼2023년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북한 담당 국가정보관을 지냈으며, 주한미군 북한 담당 선임분석관과 미 국무부 6자회담 특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국 담당 국장 등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