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하영이 여러 인터뷰와 방송에서 소개해온 가족사가 증조부의 친일 행적 논란으로 번졌습니다. 증조부가 근대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로 고종을 진료했다는 이력을 공개했지만, 해당 인물이 의사 안상호로 확인되면서 일제강점기 활동도 함께 조명됐는데요.
곧바로 하영의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는 “친일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지만, 하루 만에 입장을 철회하고 사과했죠. 11일 “추가 확인 결과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를 두고 ‘스스로 불러온 재앙’, 이른바 ‘스불재’라는 반응이 나왔는데요. 하영이 선대의 이력을 자신의 공개적인 서사로 여러 차례 소개한 뒤 시작됐다는 점에서 말이죠. 조상의 잘못을 후손에게 묻는 것은 연좌제라는 반론도 함께였습니다.

하영이 증조부의 이력을 언급한 것은 ‘옥탑방의 문제아들’이 처음이 아닌데요.
하영은 지난해 1월 24일 언론 인터뷰에서 증조부가 한양에서 양의학 의원을 처음 연 의사로 알고 있다며 고종의 진료도 맡았다고 소개했죠. 집안이 대대로 의료계에 종사했다는 점을 “당연히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앞서 조부가 고종의 주치의였다는 일부 기사에 대해서는 증조부라고 바로잡았습니다.
같은 해 5월 16일 방송된 KBS2 ‘신상출시 편스토랑’에서도 의료인 가족사가 등장했는데요. 부친과 언니가 의사이고 모친은 간호사 출신이라고 말이죠. 하영은 부모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익힌 분위기가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에서 간호사 천장미를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는데요.
6일 넷플릭스 코리아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웹예능 ‘홍보하러 온 건 맞는데’에서도 하영은 부친과 조부, 증조부가 모두 의사라고 밝혔습니다. 증조부에 대해서는 한양에서 양의학 의원을 처음 연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죠.
이튿날 방송된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는 증조부가 일본에서 양의학을 공부한 뒤 한양에 양의원을 열었고 고종도 진료했다는 설명이 다시 나왔는데요. 진행자나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지만, 같은 가족사는 지난해 1월부터 인터뷰와 방송, 작품 홍보 콘텐츠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됐죠. 하영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왔습니다.

안상호는 1890년대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자혜의원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02년 의술개업 시험에 합격했는데요. 귀국한 뒤 서울에서 진료소를 열고 서양의학을 가르쳤으며 왕실 진료에도 참여했습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일본에서 근대 의학 교육을 받고 개업 자격을 취득한 인물이었는데요. 한국인 의사들의 모임에서 활동하고 콜레라 방역에 참여하는 등 근대 한국 의학사에서 안상호가 차지하는 위치를 부정하기는 어렵죠.
그러나 일제강점기 행적은 별개의 평가 대상입니다. 안상호는 1916년 11월 29일 결성된 대정친목회에서 평의원을 맡았는데요. 대정실업친목회로도 불리는 이 단체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조선인이 순응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일선융화’를 선전했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1916년 서울에서 조직된 친일단체로 규정하고 있는데요. 익숙한 친일파 인물인 이완용과 송병준 등도 참여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도 1918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안상호의 가정을 조선인과 일본인의 동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했는데요. 안상호가 일본식 복장을 하고 일본어를 사용하는 가정생활을 했다는 내용도 실렸죠.
다만 안상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는데요.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은 안상호가 스포츠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참여한 기록을 근거로 친일행위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죠. 이 전 관장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상임부위원장으로 사전 편찬에 참여한 역사학자입니다.

논란이 확산하자 소속사는 10일 하영의 증조부가 안상호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친일 행적 등 온라인에서 제기된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는데요.
그러나 이 입장은 하루 만에 바뀌었죠. 소속사는 11일 안상호가 1916년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포함된 기록을 확인했다며 “충분한 검증 없이 ‘사실무근’이라 성급히 답변해 혼란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전했습니다.
하영의 가족사 발언에 대해서는 “방송 프로그램 출연 중 질문에 응하는 과정에서 집안의 4대 의료가업 이력을 언급했다”고 설명했는데요. 이로 인해 논란이 빚어진 데 대해 하영도 마음이 무거운 상황이라고 알렸죠.
소속사는 역사적 사실과 한 인물의 이력을 대중에게 전할 때 신중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며 하영 역시 앞으로 신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임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증조부 논란이 불거진 뒤에는 하영의 조부 안부호 교수의 이력도 함께 보도됐는데요. 안 교수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전남대 의대 병리학교실 교수로 재직, 1949년부터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죠. 하영의 부친 안병문 원장은 안 교수가 소록도병원에서 근무하던 1951년 소록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부 보도는 안 교수가 한센병 연구와 환자 치료에 헌신했다고 소개했는데요. 그러나 소록도병원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한센인을 강제로 격리하고 부당하게 감금하거나 단종·낙태수술을 시행하는 등 인권침해가 이어진 공간입니다.
현행 ‘한센인피해사건법’도 1945년 8월 16일부터 1963년 2월 8일까지 수용시설에서 발생한 격리 수용과 폭행, 부당한 감금, 본인 동의 없는 단종수술 등을 피해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데요. 안 교수가 소록도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1949년은 이 기간과 겹칩니다. 법원 판결에서도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강제 단종·낙태수술이 1950년 무렵부터 이어진 사실이 인정됐죠.
물론 근무 시기가 겹친다는 사실만으로 안 교수가 인권침해에 관여했다고 볼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는데요. 반대로 당시 소록도의 역사적 상황이나 구체적인 활동을 검증하지 않은 채 근무 경력만으로 ‘헌신한 의사’라고 평가하는 것 역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조부의 친일 논란을 조부의 선행으로 상쇄하려 한다면 조부의 이력 역시 검증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요. 선대 한 사람의 공과를 다른 가족의 이력으로 대신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죠.

논란이 불거진 시기에는 드라마의 내용도 맞물렸습니다.
하영이 출연한 ‘옥탑방의 문제아들’이 방송된 7일 SBS ‘재벌X형사2’가 첫 방송을 시작했는데요. 이튿날 방송된 2회에서는 친일 경찰의 후손들이 등장했죠.
극 중 형제는 증조부가 남겼다는 1000억원 대 금괴를 찾기 위해 연쇄 폭탄테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찾아낸 상자에는 금괴가 아니라 증조부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친일 경찰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와 훈장이 들어 있었는데요. 조상의 재산을 차지하려던 후손들이 결과적으로 감춰졌던 친일 행적을 세상에 공개한 셈이 됐습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처벌받은 이유는 친일파 후손인 점이 아닌 금괴를 차지하기 위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인데요. 다만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이익은 취하면서 그 이익에 따라오는 불편한 역사까지 외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현실의 논란과 겹쳤죠.
이 같은 설정이 ‘사이다 결말’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해방 이후 친일재산 환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회적 인식도 작용합니다. 6월에는 친일반민족재산조사위원회를 16년 만에 다시 구성하는 내용의 법률이 공포됐는데요. 법은 12월 시행될 예정입니다.

이번 논란은 하영 개인의 가족사를 넘어 공개 직후인 주연작 ‘이런 엿같은 사랑’의 홍보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는데요. 하영은 기억을 잃은 검사 고은새 역을 맡아 정해인과 함께 작품을 이끌었죠. 작품은 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는데요.
공개를 하루 앞둔 6일 넷플릭스 코리아가 선보인 웹예능 ‘홍보하러 온 건 맞는데’에서도 하영의 증조부 이야기가 등장했죠. 영상 말미에는 2편을 10일 공개한다고 예고했지만 11일 오전까지 후속편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넷플릭스는 공개가 미뤄진 이유를 밝히지 않았는데요. 친일 논란 때문에 영상을 보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작품 홍보를 위해 제작한 콘텐츠가 논란의 근거로 다시 소비되고 있는데요. 함께 출연한 정해인의 홍보 활동까지 하영의 가족사와 함께 언급되면서 제작진과 동료 배우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죠.
이번 논란에서 안상호의 행적과 하영의 대응은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요. 독립운동가의 공적이 후손 개인의 공로가 될 수 없듯 친일행위의 책임도 혈연만으로 후손에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오죠.
그렇다고 하영이 증조부의 의사 경력과 고종 진료 이력을 여러 차례 소개해온 사실까지 단순한 사생활로만 보기는 어려운데요. 대중에게 공개한 가족사의 긍정적인 부분이 평가받았다면 같은 인물의 다른 기록도 검증 대상이 될 수 있죠. 조상의 행적을 하영에게 대신 책임지라는 뜻이라기보다, 자랑스럽게 소개해온 가족사가 계기가 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기록까지 드러났다는 지적입니다.
소속사의 초기 대응도 논란을 키웠는데요. 증조부가 안상호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 친일 의혹을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지만, 하루 뒤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을 확인하고 이를 철회했는데요. 소속사도 충분한 검증 없이 답변했다고 인정했죠.
조상의 잘못을 후손에게 물을 수는 없더라도 자신이 대중에게 꺼내놓은 가족사를 검증하고 그 결과에 책임 있게 대응하는 점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마음이 무겁다는 입장을 밝힌 하영, ‘스불재’의 결과는 어떤 식으로 기록이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