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틀고 자면 안되는 이유? 질식·저체온증 괴담의 진실
선풍기보다 두려운 온열질환…열사병 의심 증상과 대처

엄마의 엄마, 그 엄마에게서 들어왔던 여름 괴담. 열대야로 괴로웠던 날에도 꼭 방에 들려 선풍기를 끄고 가는 엄마 덕에 무사히(?) 살아서 어른이 될 수 있었는데요.
이 괴담은 선풍기를 켜두면 산소가 부족해진다거나, 얼굴에 바람을 오래 맞으면 질식할 수 있다는 소문으로 더 강력해졌죠. 자는 동안 체온이 지나치게 떨어져 저체온증으로 숨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요.
그런데 낮 기온이 40도 안팎까지 치솟고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는 올여름에는 선풍기를 끄는 일이 더 두렵습니다. 에어컨 없이 선풍기 한 대로 밤을 보내는 가정도 적지 않은데요. 선풍기를 틀고 자면 정말 위험한 걸까요?

선풍기는 모터로 날개를 돌려 주변 공기를 이동시키는 기기입니다. 산소를 소비하거나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에 문을 닫고 사용한다고 방 안의 산소가 사라지지 않죠.
선풍기 바람 때문에 저체온증에 걸린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습니다. 선풍기는 에어컨처럼 실내 공기의 온도를 낮추는 기기가 아닌데요. 피부 주변의 더운 공기를 밀어내고 땀의 증발을 도와 몸에서 열이 빠져나가게 할 뿐입니다. 더운 여름밤 건강한 사람의 중심체온을 치명적인 수준까지 떨어뜨리기는 어렵죠.
흥미로운 점은 공공기관도 한때 이 속설을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인데요. 2006년 7월 14일 한국소비자원 보도자료에는 선풍기 바람이 저체온증이나 산소 부족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 안전정보로까지 소개되면서 괴담의 생명력이 길어진 셈인데요. 과학적 근거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언론 보도와 입소문을 거쳐 반복된 데 이어 공공기관 자료에까지 등장하면서, 선풍기 사망설은 오랫동안 사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선풍기 괴담은 2026년 또 다른 반전을 맞았는데요. 바로 세계보건기구(WHO)를 통해서죠. WHO는 지난달 31일 개정한 ‘열과 건강’ 팩트시트에서 선풍기는 기온이 40도 미만일 때만 사용하고 40도를 넘으면 뜨거운 공기가 몸으로 전달돼 오히려 체온을 높일 수 있다고 안내했는데요. 앞서 2024년 폭염 행동요령에서 ‘35도가 넘으면 선풍기가 더위를 덜어주더라도 온열질환을 예방하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구체적인 사용 상한선을 제시했죠.
40도 이상의 고온 환경에서는 선풍기가 오히려 체온을 높이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건데요. 이에 WHO는 에어컨이 있다면 실내 온도를 27도로 설정하고 선풍기를 함께 사용할 것을 권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체감온도를 약 4도 낮추면서 냉방에 드는 전력도 줄일 수 있는데요. 에어컨이 없다면 하루 중 2~3시간이라도 시원한 장소에 머물러야 합니다.

집 안에서는 바깥이 실내보다 선선해지는 밤에 창문을 열고, 낮에는 창문과 블라인드를 닫아 햇빛과 더운 공기를 차단해야 하는데요. 물은 시간당 한 컵씩 하루 2~3ℓ를 규칙적으로 마시고, 찬물로 샤워하거나 젖은 수건으로 피부를 식히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65세 이상 고령자와 심장·폐·신장 질환자, 장애인, 홀로 사는 사람처럼 폭염에 취약한 이들의 상태를 자주 살펴야 한다는 당부도 담겼죠.
문제는 이러한 선풍기 사용 기준을 따져야 할 만큼 올여름 더위가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다는 건데요.
경남 양산은 지난달 31일 41.4도, 1일 41.6도에 이어 2일 42.5도까지 올랐습니다. 기상관측 사상 국내 최고기온 기록을 사흘 연속 새로 썼는데요. 이후 북태평양고기압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동풍이 불면서 극심한 더위의 중심은 한반도 서쪽으로 옮겨갔죠. 산맥을 넘으며 뜨거워진 공기가 수도권과 전라권에 영향을 줬습니다.
5일 오전 11시부터 서울 전역과 인천·경기 일부, 광주·전남 일부, 전주 등에 폭염중대경보가 적용됐는데요. 폭염중대경보는 일 최고체감온도 35도 이상이 이틀 이상 관측된 지역 가운데 최고체감온도 38도 이상 또는 최고기온 39도 이상이 예상될 때 발표하는 최상위 폭염특보죠.

폭염 피해는 더 이상 한낮 논밭이나 공사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질병관리청이 4일 공개한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 집계를 보면 5월 15일부터 이달 3일까지 발생한 온열질환자는 2221명인데요. 이 가운데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는 19명입니다. 3일 하루에만 올해 들어 가장 많은 186명이 응급실을 찾았고 전북 완주에서 2명이 숨진 것으로 신고됐죠. 90대 여성은 논밭에서, 80대 남성은 길가에서 온열질환이 발생했습니다.
발생 장소는 실외 작업장이 25.4%로 가장 많았고 논밭 13.6%, 길가 12.3% 순이었는데요. 그러나 실내 작업장에서도 전체의 7.3%, 집에서도 6.9%가 발생했습니다. 집에서 발생한 환자만 약 153명인데요. ‘실내에 있으니 안전하다’거나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다’고 안심할 수 없는 수치죠.
밤에 열린 야구장도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4일 인천 SSG랜더스필드에서 열린 SSG 랜더스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는 관중 25명이 온열질환 의심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이 가운데 2명은 의식 저하 증세로 병원에 이송됐는데요. 이 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 프로야구는 결국 멈췄습니다. KBO는 5일 오후 1시 관중과 선수단의 안전을 고려해 이날과 6일 예정됐던 KBO리그 10경기와 퓨처스리그 전 경기를 모두 취소했죠. 해당 경기들은 추후 편성됩니다.

폭염은 정전으로까지 이어졌죠. 3~4일 인천 계양구와 서울 노원·강서·중랑구, 경기 수원·오산의 아파트에서 잇따라 전기 공급이 끊겼는데요. 일부 단지는 냉방기기 사용 증가로 아파트 자체 변압기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열대야에 에어컨과 선풍기까지 멈추면서 일부 주민들은 무더위쉼터와 차량, 카페 등으로 대피했죠.
더 답답한 것은 폭염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건데요. 5일 오전 6시 발표한 기상청 중기예보에 따르면 9일부터 광복절인 15일까지 아침 기온은 22~27도, 낮 기온은 29~36도로 평년보다 높습니다. 전국 대부분 지역의 최고체감온도가 33도 이상, 내륙을 중심으로는 35도 안팎까지 오르면서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질 전망인데요.
9일 강원 영동과 제주에 비가 예보됐지만, 전국적인 폭염을 끝낼 만한 비는 아닙니다. 현재 날짜별 예보가 나온 광복절까지 뚜렷한 더위 완화 신호는 없는 상황이죠.
선풍기를 밤새 켜둔다고 산소가 줄거나 건강한 사람이 저체온증으로 숨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실내 온도가 지나치게 높다면 선풍기만으로 버티는 것도 위험한데요. 집을 식힐 수 없다면 하루 중 2~3시간이라도 무더위쉼터 등 냉방 되는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물은 갈증이 나기 전부터 규칙적으로 마셔야 하죠. 어지럼증과 두통, 메스꺼움, 심한 갈증이나 근육 경련이 나타나면 즉시 시원한 곳에서 쉬어야 하는데요. 말이 어눌해지거나 이상행동을 보이고 의식이 흐려진다면 열사병일 수 있습니다. 곧바로 119에 신고하고 환자를 시원한 곳으로 옮겨 몸을 식혀야 하며,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물을 먹여서는 안 되죠.
올여름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밤새 돌아가는 선풍기가 아닌데요. 30도를 웃도는 방에서도 선풍기 한 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냉방을 무작정 참는 것, 몸이 보내는 위험 신호를 무시하는 것이죠. 선풍기 괴담이 사라진 자리에는 실제 폭염의 위험에 대한 경계가 필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