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서울중앙지법으로 출근하지만 찾는 법정은 대개 비슷하다. 특검 사건이나 유명인 재판처럼 사회적 관심이 큰 사건을 취재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작은 민사 법정을 둘러보곤 한다. 기사화가 될 만한 사건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원고’와 ‘피고’로 불리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얼마 전 방청한 보이스피싱 관련 소송도 그중 하나였다. 재판장이 이름을 부르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홀로 피고석에 앉았다. 그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였다.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전화에 속아 돈을 송금했고, 이후 피해금이 흘러 들어간 계좌 명의인으로부터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당했다.
이런 사건은 몇 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신고로 계좌가 정지되자 계좌 명의인이 “입금된 돈은 정상적인 거래대금”이라며 돌려줄 돈이 없다고 소송을 내는 것이다.
계좌 명의인이 보이스피싱 공범인지는 수사로 밝혀야 할 문제이지만, 피해금이 해당 계좌를 거친 사실만큼은 분명한 경우가 많다. 피해자는 범죄 피해를 본 데 이어 별개의 민사소송에서도 권리를 다퉈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재판부는 이날 원고 측에 “하급심에서 원고에게도 입증책임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판단이 꽤 나오고 있다”며 “원고도 적극적으로 소명하라”고 강조했다. 이어 피고를 향해서는 “피고이긴 하지만 사실상 보이스피싱 피해자이지 않냐”며 사건의 특수성을 짚었다.
실제 법원은 최근 이 같은 채무부존재 소송에서 채권자가 주로 입증책임을 부담하는 통상적인 법리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놓고 있다. 일반적인 소송과 달리 피해자가 자금의 이동 경로와 채권 존재까지 입증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의 취지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부의 한 판사에 따르면 법관들 사이에서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유형의 사건이 반복되면서 기존 법리가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시각이다.
최근 입증책임을 달리 판단하는 사례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다만 개별 사건에서 이뤄지는 판단만으로는 피해자의 부담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소송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보완도 함께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