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호황이 끝난 뒤를 준비하는 기업만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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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황일수록 더 불안합니다." 최근 만난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실적을 쓰고 있고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 시장의 승자로 평가받는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수백조 원을 쏟아부으며 AI 인프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숫자만 보면 한국 반도체 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전성기다.

하지만 정작 기업들은 축배를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다음 사이클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올해 2분기 매출 171조원, 영업이익 89조4000억원으로 또 한 번 사상 최대 기록을 썼다. 성과급 충당금만 20조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회사의 관심은 이번 분기 실적이 아니다.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D램, 2나노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 등 다음 기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역대 최고 실적을 거둔 기업의 시선이 현재가 아닌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SK하이닉스 역시 마찬가지다. AI 메모리 호황을 누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미국 나스닥 주식예탁증권(ADR) 상장을 통해 글로벌 자본시장과의 접점을 넓혔다. 단순한 자금 조달이 아니다. AI 시대 글로벌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지금 잘 팔린다고 안주하는 기업이라면 굳이 감수하지 않았을 변화다.

투자 규모만 봐도 기업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다. 최근 3대 메가 프로젝트 투자 발표 행사에서 거론된 기업 투자 규모는 총 4755조원에 달한다. 삼성은 2655조원, SK그룹은 21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지금 공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AI 이후 10년의 산업 질서를 선점하기 위한 투자다.

기업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의 호황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추격은 생각보다 빠르다. 중국 최대 D램 업체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DDR4 중심의 범용 메모리를 생산했지만 이제는 DDR5 양산 단계에 올라섰다. 아직 HBM에서는 격차가 있지만 AI 투자 열기가 잦아들고 메모리 시장이 정상화되는 순간 경쟁의 무게중심은 다시 범용 메모리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그때는 생산능력과 원가 경쟁력이 다시 승부를 가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금융시장의 반응이다. 역대 최대 실적을 발표해도 투자자들은 환호만 보내지 않는다. 시장은 이번 분기 실적보다 AI 투자 사이클이 언제 둔화될지, 중국의 추격 속도가 얼마나 빨라질지를 더 예민하게 본다. 자본시장은 늘 다음 사이클을 먼저 가격에 반영한다.

반도체 산업은 늘 같은 길을 걸어왔다. 호황은 대규모 투자를 낳고, 투자는 공급 확대를 부르고, 결국 공급 과잉은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2018년 메모리 슈퍼호황 뒤 찾아온 한파는 불과 몇 년 만에 업계의 표정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금의 AI 슈퍼사이클도 예외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을 때 가장 많은 미래 투자를 해야 한다. 가장 좋은 실적을 내고 있을 때 가장 냉정해야 한다. 기업의 경쟁력은 최고 실적에서 증명되지 않는다. 최고 실적에 취하지 않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다음 위기를 먼저 준비하는 기업만이 다음 호황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지금 한국 제조업이 보여주는 진짜 경쟁력도 어쩌면 바로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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