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5 방독면을 생산해온 한컴라이프케어, SG생활안전이 10년 넘게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법정 공방을 벌이는 배경에는 방위사업청이 2014년 한컴라이프케어의 특허가 포함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국방규격을 제정했던 근본적인 과실을 범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방규격은 유사시 무기의 품질을 보증하고 전투 수행 부대간 상호 호환에 차질이 없도록 사전에 그 규격을 상세하게 기재하게끔 지정하는 것인데, 방사청이 특정 방산업체의 특허가 끼어들어간 줄 모른 채 국방규격을 제정하면서 추후 이를 생산하려는 업체들에게 법적 족쇄를 채우게 된 셈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채로 10년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두 방산업체가 민사소송으로 국방규격 사용 자격을 다투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현행법상 방사청장은 국방규격을 제정·개정·폐지하는 주체다. 방위사업법 제26조(표준화)는 ‘방위사업청장은 군수품을 효율적으로 획득하기 위해 군수품의 표준화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하고 그 계획에 따라 군수품의 규격을 제정·개정·폐지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방규격은 유사시 누구든 동일한 품질의 무기를 따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제정된 만큼, 원칙적으로 특정 방산업체의 특허가 포함돼 불필요한 독점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다만 불가피한 경우 누구든 대체부품을 이용해 국방규격에 맞는 무기 생산이 가능하도록 사전에 조치해야 한다.
K5 방독면에 민간업체 특허를 인정한 법원은 방사청이 이 같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과실이 분명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한컴라이프케어는 2010년 7월 방위사업청에 K5 방독면 체계개발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관련 기술수준에 대한 특허·인증 및 활용 실적’ 항목에 이 사건 특허 발명을 명시했다”면서 방사청이 사실상 해당 특허를 이용해 K5 방독면 체계개발이 이루어질 것임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고 봤다.
또 “한컴라이프케어가 국방규격 초안에 이 사건 특허발명이 반영된 사실을 구체적으로 고지하지 않은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이는 한컴라이프케어 담당 직원이 관련 규정을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 누락에 방사청 담당 공무원의 업무 미숙 내지 관련 지침 미비도 상당한 원인이 됐다”며 방사청 책임을 더 크게 물었다.

이번 판결에 앞선 2021년 서울고법 역시 ‘방사청이 내린 입찰 참가자격 제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한컴라이프케어가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하면서 방사청 책임을 분명히 했다. 당시 재판부는 “방사청은 한컴라이프케어로부터 국방규격 초안을 제출받고 약 231곳의 내용이나 문구 등의 수정 여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한컴라이프케어가 기존에 보유한 특허가 사용되는 경우 거쳐야 하는 사용권 설정, 로열티 면제 협의 등을 전혀 진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질타했다.
방사청은 ‘K5 방독면 사업을 독점하려는 의도로 자사 특허를 포함시켰다’는 취지로 2017년 한컴라이프케어 임직원을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까지 했으나, 2020년 무혐의 처분됐다.
당시 검찰은 ‘사업 제안서 등 서류에 특허가 적용될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돼 있다’, ‘방사청 업무담당자가 국방규격 심의 과정에서 특허 적용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계처분을 받은 사실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이번 재판부가 판결문을 통해 “국방규격을 개정해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이유다.
방산 사건을 주로 다루는 이인희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재판부가 언급한 ‘국방규격을 개정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된 특허가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국방규격을 마련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며 “국방 이익 관점에서 보면 국방규격 제도의 목적은 특정 업체의 독점이 아니라 안정적인 군수품 수급을 확보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방산 사건 전문 변호사는 “방사청은 국방규격에 특정 업체의 특허가 들어있는지 등에 대해서 반드시 확인하도록 절차가 정해져 있다”면서 “절차를 지키지 않아 국방 규격에 한컴라이프케어의 특허가 들어가 있다는 걸 몰랐고 담당자가 해당 사안으로 징계를 받은 만큼 예산이 좀 들더라도 국방규격을 바꾸는 등 방사청이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사청은 이와 관련해 명확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방사청은 본지에 “해당 사안은 조달청을 통해 구매하는 민수용 K5 방독면과 관련해 업체 간 진행중인 민사소송으로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인 사안인 만큼 방위사업청이 해당소송의 내용이나 판결을 전제로 국방규격 개정여부 또는 향후조치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어 “방위사업청은 군수품을 조달하는 기관으로, K5 방독면의 경우 특허권자와 체결한 통상실시권 계약을 통해 군에 필요한 물량을 정상적으로 조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