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 계산도 안 되는데 손실액 뽑으라니”…정유업계, ‘최고가제’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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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 4사 손실 최대 3조원 추산…보전 예비비 부족 우려
업계 “유종별 원가 산정 불가”…전문가들도 기준 마련 난색

▲4차 석유 최고가격제 실시 첫날인 지난달 24일 전국 기름값 상승 흐름이 지속하는 가운데 서울의 한 주유소에 유가정보가 게시돼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중동 사태 장기화로 국제유가 변동성이 커지는 가운데 정부가 시행 중인 석유제품 최고가격제가 손실보전 기준을 둘러싼 논란에 직면했다. 정유사 공급가격에 상한을 두는 제도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업계 손실은 수조원대로 불어나고 있지만, 이를 어떤 기준으로 계산해 보전할지를 두고 정부와 정유업계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유가 급등에 따른 소비자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지난 3월 13일부터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있다. 정유사의 유류 공급가격에 상한을 설정해 시장 가격 급등을 억제하는 대신, 정유사에 발생한 손실은 사후 정산을 통해 보전하는 구조다. 오는 7일 4차 최고가격제에 이어 5차 발표 가능성도 거론되면서 제도는 사실상 장기화 국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정유사들이 분기별로 손실액을 산정해 제출하면 공인회계법인 검증과 석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최고가격 정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전 규모를 확정한다는 방침이다. 손실보전을 위해 6개월 기준 약 4조2000억원 규모의 예비비도 편성해둔 상태다. 다만 제도가 길어질수록 손실이 늘어나 예산이 부족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국내 주요 정유 4사의 손실이 누적 기준 최대 3조원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핵심 쟁점은 손실 산정 기준이다. 국내 정유사는 원유를 수입해 상압증류시설에서 끓는점에 따라 분리한 뒤, 중질유를 분해하는 고도화 공정을 거쳐 휘발유·경유·등유 등 석유제품을 생산한다. 문제는 이들 제품이 원유 정제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함께 생산되는 ‘연산품’이라는 점이다. 투입 원유의 종류와 품질, 정제 공정, 고도화 설비, 촉매 등 운전 조건에 따라 제품별 수율도 달라진다. 어느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손실 규모가 달라지고, 그 방식도 정유사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정부는 원가를 기준으로 실제 손실을 검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 손실이 아닌 기회이익까지 보전할 경우 재정 부담이 커지고 정책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업계 관계자는 “원유가 총 얼마 들어갔고 전체 물량이 얼마 나왔으니 리터당 얼마라는 계산은 가능하지만, 특정 제품 하나의 원가를 빼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석유 시장은 원가에 마진을 붙여 파는 구조가 아니라 국제 제품 가격이 먼저 정해지고, 그보다 얼마나 싸게 만드느냐가 정제마진이 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업계는 실제 시장에서 형성되는 싱가포르 국제 석유제품 가격(MOPS) 등을 손실 산정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원유에서 나온 제품이라도 경유나 항공유처럼 수요가 높은 제품은 휘발유보다 높은 가격대를 형성한다. 단순 원가 배분 방식으로는 실제 손실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정부가 구체적인 산식을 제시하지 않는 점도 혼선을 키우고 있다. 업계는 손실보전 예산을 편성한 만큼 정부 내부에도 손실 추계 산식이 있었을 것이라며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라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통상부는 일단 각 기업이 가능한 방식으로 계산해 제출하면 검토하겠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고가격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를 두고서도 업계 우려도 커지고 있다. 산업연구원에서는 석유 최고가격제는 단기적으로 가격 급등 억제와 소비자 부담 완화에 기여할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시장 왜곡 및 공급 축소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어 단기적 시장 안정 수단으로의 제한적 활용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한 바 있다.

정유사들은 하는 수 없이 회계법인 등을 통해 각자 손실 산정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분기마다 손실을 정산한다고 했으니 3월 13일부터 시작된 최고가격제의 첫 추계는 6월 말이나 7월쯤 제출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며 “각 사가 회계법인 등을 통해 산정 방식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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