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아닐까요. 출생의 비밀부터 금단의 사랑, 치열한 복수까지 자극적인 설정과 빠른 전개를 자랑하는 막장 드라마는 '욕하면서도 본다'는 평가와 함께 오래간 안방극장을 지켜왔습니다. 시청자들의 눈길이 스마트폰으로 향하자 숏드라마라는 형식으로 범위를 확장하기도 했죠. 자극적인 설정은 곧 시청률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전개 역시 하나의 장르적 재미로 소비됐습니다.
다만 항상 높은 화제성을 보이는 건 아닙니다. 더 세지고 더 과감해졌는데도 예전처럼 폭발적인 반응만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요. 최근 종영한 '닥터신'이 대표적입니다.

'닥터신'은 방영 전부터 기대를 모았습니다. 우선 피비 작가의 신작이라는 점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죠.
'보고 또 보고', '인어 아가씨', '하늘이시여' 등에서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전개로 늘 대중의 관심을 받아온 임성한 작가는 2021년 방송된 '결혼작사 이혼작곡'부터 피비라는 새로운 필명을 사용해오고 있는데요. '결혼작사 이혼작곡'은 최고 9.7%(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같은 해 공개된 시즌2는 최고 16.6%를 찍으면서 TV조선 드라마 가운데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새 이름값을 제대로 해냈습니다.
시청률만 호성적을 쓴 건 아닙니다. 매 작품 파격적인 장면과 대사를 선보이면서 대중의 입방아에 올라왔는데요. MBC '오로라 공주'에서 나온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대사는 종영으로부터 약 13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곤 하죠. SBS '신기생뎐'에서는 등장인물이 눈에서 초록색 레이저를 쏘고요. 전작인 '아씨 두리안'은 시모를 사랑한 며느리 설정으로 경악을 자아냈습니다. '닥터신'에서는 '오빠 보구 싶었어요… 너무나… 간절스러웠어요'라는 자막이 등장하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출연진 대부분이 오디션을 거쳐 발탁된 신인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죠. 앞서 임성한 작가는 '신기생뎐'의 임수향, '오로라 공주'의 전소민, '압구정 백야'의 박하나 등 개성 넘치는 원석을 발굴해온 바 있는데요. 여기에 그가 최초로 '메디컬 멜로' 장르에 도전한다는 점도 안방극장의 호기심을 배로 자아냈습니다.
기대 속에서 베일을 벗은 '닥터신'. 작품의 설정 자체는 그야말로 '막장'의 정점을 겨냥했습니다. 천재 외과의사가 업보를 짊어지는 서사부터, 가문의 저주와 출생의 비밀, 금기를 건드리는 관계 설정까지 기존 작품에서 선보였던 요소들이 한층 더 강하게 결합됐죠.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전개는 더욱 파격적으로 치달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최종회는 시청자들이 말을 잃게 했습니다. 방송 말미 하용중(안우연 분)은 아들, 딸의 손을 잡고 죽은 신주신(정이찬 분)의 본가에 입성했습니다. 이때 모모(백서라 분)가 마당의 골든 리트리버와 지그시 눈을 맞추다가"사랑해"라고 고백하자 강아지가 돌연 신주신으로 바뀌는, 기묘한 엔딩이 그려진 겁니다.

아무도 예상 못한 결말에 온라인상에서는 열띤(?) 반응이 속출했습니다. "진정한 뇌빼드"라는 감탄(?)부터 "낮잠 자다 꾼 꿈이 딱 이렇다",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본 내가 레전드" 등 황당하다는 의견도 이어졌죠. 임성한 작가의 전작을 거론하며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요. 일각에서는 막장 드라마의 한계를 지적하고 나서기도 했죠.
실로 시청률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1회 1.4%로 출발한 시청률은 5회에선 0.9%로 떨어졌는데요. 10회에서 1.5%로 반등했지만 1%대를 이어가다가 최종회에서야 2.3%,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마무리됐습니다. 앞서 2022년 ‘결혼작사 이혼작곡3’와 2023년 ‘아씨 두리안’은 각각 최고 시청률 10.4%와 8.1%를 기록한 바 있는데요. 이번 '닥터신'이 2.3%를 기록하며 하락세를 잇는 모습이죠.
막장의 힘이 약해진 요즘일까요? 임성한 작가와 함께 '막장 대모'로 불리는 작가들의 특별한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는 요즘입니다.
'막장 3대 대모' 중 한 명인 김순옥 작가의 '펜트하우스' 시리즈는 시즌 1~3의 자체 최고 시청률이 각각 28.8%, 29.2%, 19.5%를 기록하며 '대박'을 쳤는데요. 이후 '7인의 탈출'과 '7인의 부활'에서는 각각 7.7%, 4.4%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특히 '7인의 부활'은 그해 방송된 SBS 금토 드라마 가운데 유일하게 '한 자릿수 시청률'에 머무는 굴욕을 맛봤죠.
김순옥 작가는 다음 달 방송 예정인 JTBC 토일 드라마 '신입사원 강회장'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하는데, 아직 차기작 소식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막장의 대가, 문영남 작가는 2023년 '빨간풍선' 종영 이후 차기작 '너 없이 못 살아' 제작 소식을 전했는데요. 편성 등 별다른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불호를 넘어 막장 드라마를 소비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신호로도 읽힙니다. 과거 출생의 비밀이나 금기적 관계, 빙의 같은 설정 자체가 충격으로 작용했다면 이제는 익숙한 공식으로 소비되면서 긴장감이 크게 떨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데요. 신선함보다는 '예상 가능한 패턴'으로 인식되며 시청자들의 피로감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거죠.
'닥터신'의 경우 장르도 짚어볼 수 있습니다. 작품은 '메디컬 스릴러'를 표방합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천재 의사와 하루아침에 뇌가 망가져 영혼을 잃어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만큼 멜로부터 가족극, 샤머니즘 등 다양한 요소가 등장하는데요. 이를 유기적으로 엮어내지 못할 경우 이야기의 중심축이 분산, 서사의 설득력을 잃는 부작용을 겪기 십상이죠.
시청 환경의 변화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최근 드라마 시장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와 숏폼 콘텐츠를 중심으로 빠른 전개와 강한 몰입도를 요구하는 흐름이 뚜렷해졌습니다. 짧은 호흡의 장면 전환과 즉각적인 보상이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게 임성한 작가 특유의 길고 철학적인 독백, 롱테이크 신은 상대적으로 지루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죠.

다만 '닥터신'을 단순히 시청률 부진으로만 평가하기에는 아쉬운 지점도 있습니다. 수치와 별개로 작품의 실험적 접근이 일부 시청층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점에서인데요.
가장 주목할 부분은 장르 결합 방식입니다. 의학이라는 과학적 영역에 무속, 빙의 등 영적 세계를 접목한 전개는 기존 메디컬 드라마의 틀을 깨부숩니다. 장르 간 경계를 과감하게 허무는 접근으로 임성한 작가 특유의 세계관 확장 가능성을 드러냈다는 평가도 나오죠.
또 일부 장면은 기존 시청률 중심의 흥행 지표와는 다른 방식으로 화제성을 형성해 눈길을 끄는데요. '닥터신' 결말을 포함한 적지 않은 장면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밈(meme)으로 재생산되며 확산했습니다. 과거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 드라마의 공식이 시청률로 이어졌다면, 최근에는 온라인상의 2차 콘텐츠로 가공 및 공유되는 등 변화한 소비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해석할 수 있죠.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렸지만, 그럼에도 특정 시청층에서 "피비식 전개"에 대한 호응이 이어지는 배경에는 이러한 문법이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되는데요. 임성한 작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쿨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최근 유튜버 엄은향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내가 봤을 때 형편없고 재미가 없으면 반성할 노릇인데 내가 봐도 내용이 괜찮고, 사람들이 '재밌다', '빠져서 본다'고 문자가 온다. 그러면 된 거지. 숫자에 빠져서 살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죠.
"몇 년 정도 휴식을 가질까 고민 중"이라며 향후 활동 계획도 언급했는데요. 당장 그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팬들에겐 아쉬운 소식이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