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중심 질서 저항…메시지 ‘모순’
‘의도 않은 편견’의 잔재 살펴봐야

할리우드에는 ‘노란 얼굴(yellowface)’ 연기라는 관행이 있다. 백인 배우가 아시아인으로 분장하는 연기를 가리킨다. 기원은 18세기 중반의 볼테르 원작의 연극 ‘중국의 고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계에서는 백인이 흑인 역할을 대신하던 ‘검은 얼굴’ 연기를 이어받아 등장한 표현이다.
1930년대 ‘찰리 찬’ 시리즈는 스웨덴계 배우 워너 올랜드가 중국계 형사 역을 맡아 연속 흥행을 터뜨렸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이를 통해 인종의 왜곡이 수익을 창출한다는 경험을 갖게 됐다.
패션과 권력, ‘커리어 우먼’이라는 문제를 코믹하고 날카롭게 그려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20년 만에 돌아왔다. 개봉을 앞두고 메릴 스트립의 복귀와 앤 해서웨이의 패션이 화제가 됐다. 그러나 예고편에 스치듯 등장한 조연 ‘친저우’가 입방아에 올랐다. 주인공 앤디의 보조인 친저우는 다른 캐릭터와 달리 촌스러운 체크무늬 옷에 두꺼운 안경을 쓴 모습이다. 친저우라는 이름이 영어권에서 중국인을 비하할 때 쓰는 ‘칭챙총’이라는 발음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상사를 공개 비판하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모습이 서구 사회가 아시아계 고학력자에게 갖는 “공부는 잘하지만, 사회성은 부족하다”라는 고정관념을 재현한다는 평가도 더해졌다.
‘노란 얼굴’ 연기의 악명 높은 사례는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일본인 캐릭터 유니오시다. 백인 배우 미키 루니가 특수 분장으로 눈을 작게 만들고, 과장된 치아 보형물을 끼운 채, 거친 아시아식 억양으로 연기한 인물이다.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훗날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고백했지만, 루니의 연기는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남았다. 요즘엔 아예 캐릭터의 인종을 바꿔버리는 ‘화이트 워싱’이라는 방식이 이를 대신한다.
‘노란 얼굴’ 연기의 관행이 지속된 건, 할리우드 제작사 내부 방침인 ‘헤이스 코드’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엔 미국의 사회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다른 인종 배우 사이의 성적 접촉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대체된 아시아인 캐릭터가 대부분 온순하고 내성적인 소극적 성격을 보여주거나, 반항적이고 괴팍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더 한심한 사례도 있다. 1977년, 존 랜디스 감독의 코믹 패러디물 ‘켄터키 프라이드 무비’에는 한국계 배우가 여럿 출연했다. 그중 합기도 무술인 한봉수가 감독의 지시를 받아 “한국말로 무조건 말하라니 한심하군”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즉흥 대사를 내뱉는다. 이 장면은 그대로 영화에 삽입됐다. 배우의 언어를 의미 있는 대사가 아니라 그저 ‘이국적인 소음’으로 취급한 것이다.
친저우 역할은 중국계 미국인 헬렌 쉔이 맡았다. 제작사는 아시아인 배우를 직접 캐스팅했으니 ‘노란 얼굴’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상상력이다. 아시아인 배우를 기용하면서도 캐릭터를 기획하는 방식이 여전히 서구 중심의 고정관념에서 출발한다면, 분장 없는 ‘노란 얼굴’일 뿐이다. 배우는 아시아인이지만 이야기 전략은 여전히 유니오시와 다를 바 없다. ‘모범적 소수자(model minority)’ 신화라는 편견은 ‘사회성이 부족한 이방인’이라는 전형성을 드러내면서 이런 방식의 위계화를 통해 소수자를 주류의 바깥으로 몰아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여성의 야망과 사회적 역할을 진지하게 다루면서 인기를 얻었다. 패션 산업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연대는 남성 중심 서사가 지배하던 할리우드에서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런 이야기가 아시아 여성 캐릭터를 고정관념으로 접근하는 순간 모순에 빠지고 만다. 젠더차별과 직종차별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또 다른 인종차별에는 무감각한 태도는 ‘내부의 차이’를 무시하는 콘텐츠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드러낸다. 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분리되지 않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는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했다. 제작진이 ‘노란 얼굴’의 역사를 알면서 의도적으로 캐릭터를 기획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개봉 초반이라 관객의 반응이 어디로 방향을 잡을지도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종, 젠더, 계급, 국적처럼 정체성과 결부된 소수자 표현에서 ‘의도하지 않은 차별’은 ‘의도한 차별’만큼이나 상처를 남긴다. 영화가 글로벌 플랫폼에서 동시 유통되는 시대에는 그저 선한 의도만이 아니라 훈련된 감수성이 필요하다. ‘노란 얼굴’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 역사가 남긴 고정관념의 잔재는 언제든 스크린 위로 투사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