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고 잠 자고⋯쉬는 것도 대회가 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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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한강 잠퍼자기 대회 모습. (사진제공=서울시)

서울 도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90분 동안 멍하게 앉아 있는 대회가 열렸고, 한강에서는 방해 요소를 이겨내며 누가 더 깊이 잠드는지를 겨루는 행사가 열린다. 휴식이 개인의 일상을 넘어 하나의 도시형 콘텐츠가 되는 모습이다.

서울시는 5월 2일 오후 3시 여의도한강공원 멀티플라자에서 '2026 한강 잠퍼자기 대회'를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2024년 처음 시작돼 올해 3회째를 맞은 행사다. 올해는 신청 사연 등을 바탕으로 170명이 참가자로 선발됐다. 참가자들은 한강에 누워 잠을 청하되, 깃털을 이용한 간지럼이나 모깃소리 같은 '방해 공작'을 견뎌야 한다. 최종 순위는 깊은 수면 유지 시간과 수면 품질 등을 종합해 결정된다.

도심 한복판의 '멈춤'

▲2026 광화문 멍때리기 대회 모습. (연합뉴스)

잠퍼자기 대회가 잠을 겨룬다면, 광화문에서는 이미 '멍때리기'가 대회가 됐다. 14일 서울 광화문광장 육조마당에서는 '2026 광화문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90분 동안 말하지 않고, 스마트폰도 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대회는 심박수 안정성과 시민 투표 등을 바탕으로 승부를 가렸다.

멍때리기와 잠자기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휴식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행위가 대회가 되고, 시민이 신청하고, 관람객이 지켜보는 콘텐츠가 됐다.

두 행사는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광화문 멍때리기 대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도심 한가운데로 꺼냈다. 한강 잠퍼자기 대회는 '잘 자는 일'을 경쟁의 형식으로 바꿨다. 바쁜 일상에서 멈추고 쉬는 일이 그만큼 낯설어졌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잠도, 멍도 부족한 사람들

▲여의도역 일대에서 시민들이 출근길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투데이DB)

이런 행사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단순히 이색적이어서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피곤하지만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4년 전 국민(10세 이상)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 4분으로 5년 전(2019년)보다 8분 줄었다. 1999년 조사 시작 이후 수면시간이 줄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비율은 11.9%로 5년 전보다 4.6%포인트 높아졌다.

수면 부족은 직장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은 학업과 학원 일정에 밀려 잠을 줄이고, 자영업자는 영업과 비용 부담 속에서 쉬는 시간을 미룬다. 육아와 돌봄을 맡은 사람은 자기 시간을 가장 뒤로 보낸다. 각자의 이유는 다르지만, 몸과 머리를 완전히 멈추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점은 비슷하다.

스마트폰도 휴식을 어렵게 만든다. 쉬는 시간이 생겨도 메시지를 확인하고, 영상을 보고, 업무 알림을 확인한다. 몸은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리는 계속 움직인다. 이런 사회에서 '멍때리기'와 '잠자기'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간이 됐다.

쉬는 것도 계획하는 시대

▲쉬는 것도 계획하는 시대. (사진=챗GPT AI 생성)

최근 휴식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시간이 아니라 따로 확보해야 하는 일정에 가까워졌다. 명상 앱을 켜고, 수면 음악을 듣고, 숙면용 베개와 조명을 산다. 주말에는 쉬기 위해 호텔을 예약하거나 공원 프로그램을 신청한다. 쉬는 일마저 계획표 안에 넣어야 겨우 가능해진 셈이다.

광화문 멍때리기 대회와 한강 잠퍼자기 대회는 이런 변화를 가볍지만 선명하게 보여준다. 참가자는 도심 한복판에서 멍하니 앉거나, 한강에 누워 방해 요소를 견디며 잠을 청한다. 관람객은 그 장면을 보며 웃지만, 동시에 "나도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행사가 수면 부족이나 번아웃을 직접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쉼을 개인의 게으름이나 시간 관리 실패로만 보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도시는 일하고 소비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멈추고 회복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쉬는 일이 대회가 된 풍경은 낯설지만, 그 배경은 익숙하다. 충분히 쉬지 못하는 일상이다. 광화문에서 멍때리고 한강에서 잠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웃긴 장면을 넘어, 바쁜 도시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읽힌다. "지금 우리는 충분히 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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