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_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유럽 극우정당들 ‘트럼프 거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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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 이후 앞다퉈 ‘손절’ 나서
中 호감도는 처음 미국 앞지르기도
‘자국 우선’ 유럽·美 갈등 오래갈 듯

“우연히 트럼프를 알게 됐다. 우연하게!”

‘영국의 트럼프’라 불리는 나이젤 패라지가 공개석상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반이민과 인종주의적 성격의 극우정당인 영국개혁당의 당수다. 1년 전부터 개혁당은 지지율에서 집권 노동당보다 7~10%포인트(p) 앞서 1위를 달린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긴밀한 친분을 강조해왔고, 트럼프도 2년 전 패라지의 환갑을 공개적으로 축하하며 자신의 분신이라고 자랑했었다.

그랬는데 패라지가 트럼프를 우연히 알게 됐다고 몇 걸음 물러섰다.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공습 후, 미국 대통령과의 친분을 강조하는 것이 선거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단 영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회원국에서도 극우정당들이 트럼프와 거리두기에 나섰다. 그렇다고 극우정당들의 세력이 약해지는 신호라고 보기에는 이르다.

독일대안당(AfD)은 지난 11일 지방선거에 대비한 선거공약을 발표했다. 난민 신청에 실패한 사람, 난민 중에서도 범죄인 등을 강제로 추방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헌법을 개정, 난민권을 폐지하겠다는 내용도 담았다. 트럼프와 유사한 정책을 선언한 정당임에도 이란 공습에 대해서는 신중하다. 정당 지도부는 지난달 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진영과의 접촉을 줄이라고 의원들에게 요구했다. 지난해 말까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가 진영에 대규모 사절을 보냈었다. 독일대안당의 공동대표이자 가장 친트럼프적 정책을 취해왔던 알리스 바이델은 트럼프 행정부가 아무런 계획 없이 이란을 공습해 재앙을 야기했다고 비판했다. 이란 공습 후 에너지 가격과 물가 폭등, 경제성장률 저하 때문에 미국을 나쁜 동맹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잡았다.

프랑스의 국민연합(RN)도 마찬가지다. 30대 당수 조르당 바르델라는 지난달 트럼프 행정부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비판하며 “트럼프와 같은 형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드골주의는 프랑스 정치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기본적인 외교정책의 기조다. 극우정당이라고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내년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RN이 정당 지지도에서 1위를 달려 왔는데 트럼프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전쟁이 계속될 경우 대규모 이슬람 이민의 유입 가능성도 걱정한다.

EU 회원국 수반 가운데 트럼프 취임식에 유일하게 초청을 받은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대통령과의 친분을 정치에 십분 활용했다. 그런 그마저 이란 공습에 필요한 미국 전투기의 시칠리아 기지 내 착륙을 거부했다. 멜로니는 “우리는 이란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며 “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2일 헝가리 총선에서 16년간 총리로 재직했던 오르반 빅토르가 대패했다. 미국의 밴스 부통령까지 나서 6일부터 이틀간 현지로 가 극우정치인의 유세를 지원했다. 유세 현장에서 트럼프는 전화로 “이민을 규제해 서구 문명을 수호했다”며 오르반을 추켜세웠다. 그럼에도 야당인 티서(존중과 자유당)가 199석의 하원 의석 가운데 3분의 2가 넘는 138석을 얻었다. 이처럼 이란 공습 후 유럽 내 극우정당들은 최소한 트럼프와 거리두기에 나섰고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크게 패했다. 그렇다고 유럽의 극우정당 세력이 하락세에 접어든 것은 아니다. 컨설팅사인 유라시아 그룹의 무지타바 라만 대표는 “이란 공습으로 유럽의 경제성장률이 하락할 것으로 보여 극우 정당에는 기성정당의 정책 실패를 공격할 좋은 기회이다”라고 분석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란 공습 때문에 EU의 경제성장률을 0.3%p 내린 1% 안팎으로 전망했다. 이달 초 갤럽의 세계 여론조사에서도 중국의 호감도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5%p 앞질렀다.

세계인들조차 트럼프 행정부를 좋지 않게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던 유럽의 극우정당조차 이런 거대한 흐름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자국 우선 정책을 내세우는 유럽의 극우정당과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이 갈등은 지속될 듯하다.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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