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부산 금융중심지 17년⋯“기관만 있고, 금융은 없다” [금융메카 분산의 역설 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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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금융 지도가 요동치고 있다. 서울과 부산에 이어 '제3금융중심지' 지정을 둘러싼 논의가 전북을 중심으로 10년 만에 다시 불붙었다. 시중은행들이 전북혁신도시로 자산운용 기능을 옮기며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지만, 현장의 시선은 차갑다. 먼저 닻을 올렸던 부산은 지정 17년이 지났음에도 "기관만 있고 산업은 없다"는 냉정한 평가 속에 '무늬만 금융도시'라는 비판을 마주하고 있다. 본지는 금융중심지 정책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진정한 '지방 금융시대'를 열기 위한 실질적 생태계 조성 조건을 짚어본다.

금융공공기관 이전해도 정책·투자 결정은 서울서 집중
글로벌 금융·자본 유입 정체⋯“금융중심지 체감 못 한다”
교육·일자리 일부 효과⋯“금융생태계가 돈버는 구조 돼야”

▲지난달 31일 오후 한산한 부산 남구 문현금융로. (김이현 기자)

부산 남구 문현동 부산국제금융센터(BIFC). 63층 높이의 거대한 마천루에는 한국거래소,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예탁결제원,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금융 공룡’들이 포진해 있다. 2009년 금융중심지 지정 이후 수도권에서 옮겨온 금융공공기관들이다.

점심시간이면 BIFC 주변은 인근 식당과 카페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5000여 명의 상주 인원이 빚어내는 활기는 여느 서울 업무지구 못지않다. 하지만 오후 2시가 지나면 분위기는 급반전된다. ‘금융지구’의 생동감은 적막함으로 바뀐다. 거리는 한산해지고 유동 인구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금융중심지 지정 17년, 부산 금융의 현주소는 화려한 외관 속에 갇힌 ‘내륙의 섬’이었다.

문현동에서 프랜차이즈 순댓국집을 운영하는 한모(40) 씨는 지난달 31일 기자와 만나 “외부 사람이 부산에 놀러 오면 다 바닷가 쪽으로 가지 이쪽에는 크게 볼일이 없다”며 “식당에 오는 사람 대부분은 여기(BIFC)서 일한다. 딱 점심시간에만 붐비고 저녁에는 바쁘진 않다”고 말했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금융공공기관 종사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냉담했다. 한 금융공공기관 관계자는 “부산에 내려왔다고 해서 딱히 달라진 건 없다”며 “장소만 이동했을 뿐, 업무 환경은 기존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 역시 “부산의 인프라는 훌륭하지만 ‘금융중심지’로서의 기능이 작동하는지는 의문”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물리적인 본사 주소지만 부산으로 옮겨왔을 뿐, 금융의 핵심 엔진은 여전히 서울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자금 조달과 정책 협의, 투자 의사결정 등 주요 업무가 서울에서 이뤄지는 탓에 본사인 부산이 ‘지점’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한 금융공공기관 관계자는 “사업 특성상 시중은행과 계약을 맺으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고, 금융당국에서도 정책 회의를 한다고 수시로 부른다”며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서울행 열차를 탄다. 기관 이전 정책은 이해하지만, 효율성은 전보다 더 떨어졌다”고 토로했다. 이름뿐인 ‘금융중심지’가 아닌, ‘금융 유배지’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부산 금융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자생적 생태계’의 부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자산운용사 등 국내에 들어온 외국계 금융회사의 본사는 2024년 기준 166개였고, 이중 164개가 서울 소재였다. 나머지 2곳마저도 수도권이다. BIFC 63층에 외국계 금융회사 유치를 위한 공간이 제공되지만, 최근 들어 한국씨티은행과 UIB손해보험중개 등이 입주한 정도에 그친다.

심지어 부산의 금융중심지 전략을 수립하는 기관인 부산국제금융진흥원도 지난해 6월 포럼에서 “부산의 국제 금융 생태계는 퇴보 중”이라고 평가했다. 진흥원 관계자는 “홍콩이나 싱가폴 등 금융이 활성화된 도시는 금융 자체가 주된 산업”라며 “우리도 미래 먹거리가 금융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했다.

▲부산 남구 문현동 BIFC. (김이현 기자)

시민들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0대 택시기사 이모 씨는 “조선업이나 항만이 여기(부산)에 있고, 제2도시니까 더 키워보자는 차원에서 금융지구를 만들었는데 그게 다 따로 논다”며 “잘 됐으면 젊은 사람들이 부산에 남아있었을 텐데 죄다 빠져 나가고 있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수도권으로 취업한 직장인 김모(36) 씨도 “어릴 때부터 부산이 국제금융도시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적으로 체감한 적은 없다”며 “금융이든 기업이든 핵심은 다 수도권에 몰려있다 보니 부산에 남을 이유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다.

물론 금융공공기관 이전이 지역에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인재 채용제도 적용으로 지역 대학 출신 인력의 금융권 진입 기회가 확대되는 등 긍정적인 변화도 나타났다. 혁신도시법은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은 신규 채용 인원의 30% 이상을 지역인재로 채용하도록 하고 있다.

한 금융공공기관 관계자는 “금융중심지가 시너지를 내 경제 전반을 끌어올렸다면 또 다른 얘기겠지만, 교육이나 고용 측면에서 보면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며 “부산에서 지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겨나면서 부산지역 대학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신입 직원의 절반 가까이는 지역에서 채워진다”고 설명했다.

다만 ‘제3금융중심지’로 거론되는 전북과의 비교에선 위기감이 묻어났다. 이 관계자는 “부산은 기관이 먼저 내려온 뒤 금융을 붙이려는 구조였다면, 전북은 국민연금이라는 막강한 자본을 중심으로 금융사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라며 “대형 금융지주도 그 룰에 맞춰서 먼저 들어가고 있다. 아마 10년 뒤면 부산보다 더 활발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전북은 당장 갖춰지지 않은 인프라가 발목 잡을 순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운용사와 금융사가 자연스럽게 모이면서 생태계가 형성될 듯하다”며 “돈이 돈을 버는, 금융 생태계가 돈을 벌어다 주는 구조가 돼야 전체가 발전한다. 부산은 규제도 많고 시장이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획이 무산돼 그게 안 됐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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