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톡!] 갈 길 먼 ‘한국의 IP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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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주 삼성벤처투자 투자심사역·변리사

지식재산의 수준을 한 줄의 순위표로 환원하는 방식은 많은 것을 놓치게 만든다. 서로 다른 역사와 산업 구조, 법제와 집행 현실을 가진 나라들을 하나의 숫자로 줄 세우는 일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 상공회의소가 매년 발표하는 국제지식재산지수는 한 번쯤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순위 자체보다, 국제사회가 어떤 제도와 정책을 ‘좋은 지식재산 환경’의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2026년 발표된 국제지식재산지수에서 한국은 55개국 중 10위, 85.94%를 기록했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7위, 90.81%)보다 뒤졌지만 싱가포르(13위, 80.13%), 대만(20위, 66.36%)보다는 상위권이다. 특허권 관련 카테고리에서 94% 이상, 시스템 효율성 부문에서는 만점을 받았다. 지식재산처 승격, 영업비밀 보호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됐고, 온라인 불법복제 대응 체계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식재산을 단순한 권리 등록이 아니라 기술 보호와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 결과다.

그러나 미완의 과제도 뚜렷하다. 인공지능(AI) 저작권 가이드라인과 AI 기본법은 방향성을 제시했지만, 학습데이터 이용, 생성물 귀속, 권리 침해 판단 같은 핵심 쟁점에 대한 실질적 규범은 여전히 부족하다. 데이터 독점권 제도 역시 2025년 공식화 자체는 긍정적이나, 신약 기본 보호기간이 6년으로 미국·유럽의 8~12년에 비해 짧아 글로벌 기준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더 큰 문제는 고치기 어렵기보다, 고치지 않고 있는 제도들이다. 사이버범죄 협약 미가입으로 해당 항목에서 0점을 받았는데, 가입 결정만으로 즉시 해소할 수 있는 공백이다. 라이선스 계약 등록 의무는 외국 기업의 사업 기밀 노출 부담으로 작용하며, 지식재산(IP) 자산사업화 부문 순위를 55개국 중 29위에 머물게 한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제도 하나를 손보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IP 거래 환경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순위는 참고자료일 뿐이다. 그 너머에 있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AI 시대에 걸맞은 규범을 갖추고, IP 자산의 사업화와 국제 거래를 촉진하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한국 지식재산 정책이 답해야 할 진짜 과제다.

고은주 삼성벤처투자 투자심사역·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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