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전환 발목 잡는 금산분리 딜레마 [규제 만능주의의 그늘中-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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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적 금융 드라이브 속 금산분리 개편 ‘시험대’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 10개월째 제자리

선의는 언제나 명분이 된다.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말로 시작된 규제는 많았다. 그러나 충분한 숙의와 영향 평가 없이 속도를 낸 법안들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질문을 남겼다. 보호를 목표로 한 규제가 과연 의도한 효과를 냈는지, 아니면 시장의 균형을 흔들고 또 다른 왜곡을 낳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투데이는 ‘선의로 시작된 입법’의 출발과 결과를 추적하고 정치적 상징 뒤에 가려진 비용과 왜곡, 그 책임의 방향을 짚어본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12일 충남 아산 하나마이크론에서 생산설비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제공=금융위원회)

금산분리는 산업 자본의 은행 지배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도입됐다. 재벌의 사금고화를 차단하고 금융 시스템 안정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디지털 전환과 산업 구조 재편이 가속화되면서 기존 규제 틀이 혁신 투자까지 제약한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플랫폼·데이터 중심 경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금융의 자금 배분 기능이 산업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10개월째 제자리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4월 금융지주회사가 핀테크 기업 지분을 보유할 수 있는 한도를 기존 5%에서 15%로 확대하는 내용 등을 담은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금융위는 당시 “현행 금융지주회사법령의 경직적인 출자 규제로 인해 금융지주회사와 핀테크 기업 간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이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며 제도 개선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 제출되지 못한 채 입법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정책당국은 최근 생산적 금융 기조 속에서 금산분리 완화 필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11월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금융지주회사의 핀테크 지분 규제 완화 법안과 관련해 “저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부분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혁신·첨단산업 투자 확대를 정책 전면에 내세우지만 제도 정비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금융권의 평가다.

쟁점은 출자 한도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규제 체계 역시 자금 흐름에 구조적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생산적 금융 활성화를 위한 경제계 의견’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권 자금은 기업금융 등 생산적 분야 보다 부동산 중심으로 과도하게 편중돼 있다. 원화대출금 대비 부동산 대출 비중은 2020년 66.6%에서 2024년 69.6%로 상승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동산 대출 비율도 같은 기간 62%에서 65.7%로 확대됐다.

보고서는 현행 위험가중자산(RWA) 체계가 자금 쏠림을 강화한다고 지적했다. 담보가 있는 주택담보대출의 위험가중치는 평균 15% 수준인 반면 기업대출은 75%, 벤처투자는 400%에 달한다. 기업·벤처 금융을 확대할수록 자본 부담이 급격히 증가하는 구조다.

금융당국도 이 같은 구조적 한계를 인정하고 은행의 펀드 투자 관련 위험가중치 합리화를 추진 중이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 11일 광주·전남 지역 간담회에서 정책 목적 펀드에 대한 위험가중치를 기존 400%에서 100%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민간 금융회사의 투자 참여 유인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또 국민성장펀드와 함께 투자에 참여한 민간 금융회사에 대해서는 고의·중과실이 없는 경우 임직원 제재를 면제하는 방안도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금융권에서는 생산적 금융을 중심으로 한 규제 완화 움직임이 실질적인 제도 개편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위험가중치 완화는 의미 있는 신호지만 핀테크에 한정한 출자 완화로는 AI·데이터·플랫폼 중심 산업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며 “산업과 금융의 경계가 흐려진 만큼 규제 체계도 현실에 맞는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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