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하기 위해 버텨본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읽다 보니, 경제]

(사진제공=예스24)

한여름 호숫가에서 한 소녀가 사라졌다. 그날 이후, 남은 소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김서해 작가의 장편 '여름은 고작 계절'은 IMF 외환위기 이후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 소녀 제니의 시선에서 무너져 가는 아메리칸드림과 정체성의 균열을 그린다. 낯선 땅에서 만난 또 다른 이민자 한나와의 우정은 냉소와 동경, 질투와 연대가 뒤섞인 채 끝으로 향한다. 단순한 사춘기 소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자신을 잃고 다시 찾으려는 이방인들의 고백에 가깝다.

10살 소녀 제니의 생존 서사

소설은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 소녀 제니가 학교에서 새로운 이민자 소녀 한나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제니는 백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깎고 마모시키려 노력한다. 한나는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으려 한다. 그런 한나를 제니는 부러워하기도, 미워하기도 한다. 두 소녀는 생존을 위한 서로 다른 전략을 선택하며 미묘한 우정과 경쟁의 관계를 이어간다.

냉소와 질투 속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던 두 소녀에게 여름이 찾아온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백인 아이들이 초대한 호숫가 모임에 참석하게 된 두 사람. 그곳은 제니가 오랫동안 동경해온 공간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후, 단 한 사람만이 호수를 빠져나온다. 호숫가에서 벌어진 사건은 우정, 배신, 죄책감, 그리고 용서의 문제를 깊이 새기며 두 소녀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는다.

읽다 보니, 경제

이 소설의 핵심 배경에는 2000년대 초반,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와 이어진 '아메리칸 드림'의 붕괴와 이민자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 제니의 부모님은 한국에서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계 부채와 실업률이 급등하며, 많은 한국 가정이 ‘탈출구’로서 해외 이민을 선택했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피유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2000년대 초반 매년 약 1만5000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 사회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소수 인종 이민자들에게 경제적 성공뿐 아니라 언어·문화·사회적 적응까지 요구하는 가혹한 생존 경쟁을 의미한다. 피유리서치센터 2023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 한국계의 절반 이상이 외국 출생 이민자로, 이들은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절제를 강요받았다고 한다. 제니가 백인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행위는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정체성을 희생해야만 했던 이민 1.5세대의 내면적 고통을 상징한다.

한국인과 미국인, 아이와 어른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이민자 아이들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 때문에 교육·노동시장 진입에서도 제약을 받는다. 미국 이민정책연구소(Migration Policy Institute)에 따르면, 한국 태생 이민자 중 1.5세대의 다수가 “이중언어·이중문화 환경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고 답했다.

외로운 존재들의 처절한 고백

"서럽다는 ‘sad’와 달라서 더 길고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했다. 서러움은 억울함이 잔뜩 섞인 답답한 슬픔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밑바닥에 자글자글 깔린, 그런 슬픔이었다." 소설 속에서 제니가 '서럽다'는 감정을 영어로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이 이야기는 결국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외로운 존재들의 고백이다. 여름은 지나가는 하나의 계절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서 겪은 우정과 사건들은 제니의 삶에 깊이 각인된다.

이 소설은 지나온 상처를 되돌아보는 반성문이자, 그 상처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성장의 기록이다. 덧없지만 소중했던 지난 시절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가장 정확한 언어로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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