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늘 사람으로 붐비지만, 끝까지 함께해 줄 사람 없이 사라지는 삶도 동시에 존재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파리 빈민가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사회의 시선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파리의 슬럼가 벨빌, 전직 매춘부이자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로자 아줌마는 매춘부의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간다. 그중 한 명인 소년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엄마이자 세상의 전부로 여기며 자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로자 아줌마는 치매와 노환으로 급격히 쇠약해지고 고립되어 간다. 모모는 병원에서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당하고 싶지 않다는 아줌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그녀를 지하실의 은밀한 안식처로 옮겨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킨다.
아줌마가 끝내 숨을 거두자, 모모는 죽음으로 인한 부패와 악취를 가리기 위해 그녀의 시신에 향수를 뿌리고 화장을 해주며 며칠 동안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후 모모는 슬픔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며,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곁에 모모가 없었다면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은 홀로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관계 하나의 존재 여부가 죽음의 방식까지 바꾸는 이 장면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4년 고독사 사망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사회적 고립 상태에서 생을 마감한 사례는 3661명에 달한다. 2022년(3559명)보다 늘었고, 최근 5년간 연평균 증가율은 5.6%로 집계됐다.
수치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증가세만이 아니다. 고립이 특정 집단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3년 고독사 사망자의 84.1%는 남성이었고, 연령대별로는 60대(1146명)와 50대(1097명)가 가장 많았다. 중장년 남성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고립이 더 이상 노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장과 직접 맞닿은 세대로 확산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죽음이 발생한 공간 역시 이러한 변화와 맞닿아 있다. 전체의 48.1%는 일반 주택에서, 20.7%는 원룸·오피스텔에서 발생했다. 고시원이나 비주거 공간보다 오히려 일상적인 주거 공간에서 고립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혼자 사는 집은 더 이상 개인의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외부와의 연결이 끊긴 채 방치되기 쉬운 장소가 되고 있다.
이 같은 단절은 죽음을 발견하는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2023년 기준 최초 발견자는 임대인·경비원·건물관리자(34.5%)가 가장 많았고, 가족(26.2%)은 그보다 낮았다. 혈연보다 계약 관계가 먼저 죽음을 마주하는 구조가 일상화된 셈이다. 이는 개인의 사회적 관계망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제적 조건 역시 고립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고독사 사망자 가운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41.4%에 달한다. 이는 고립이 개인의 성향이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빈곤과 고용 불안, 주거 불안이 중첩된 구조적 결과임을 시사한다. 동시에 절반 이상이 수급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고립은 특정 계층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해진다.
이처럼 소외된 삶과 죽음은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복지 지출 증가와 노동력 상실, 의료·사후 처리 비용으로 이어지며 사회 전체가 부담해야 할 경제적 비용으로 전환된다. 관계의 단절이 사회적 손실로도 귀결되는 것이다.
모모가 로자 아줌마 곁에서 향수를 뿌린 이유는 단순히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 대우받게 하려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외된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예산과 정책이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곁에 남아주는 관계가 회복될 때 비로소 소외된 삶은 존엄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혼자 살아가도록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