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부동산 대신 증권사로 자금 이동
퇴직연금 머니, 펀드 시장의 새 동력

국내 펀드시장이 빠른 속도로 외형을 확대하고 있다. 전체 순자산총액이 1300조 원을 넘어선 가운데, 특히 공모펀드와 상장지수펀드(ETF)가 개인 투자자 수요를 흡수하며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23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9일 기준 국내 전체 펀드 순자산총액(ETF 포함 공·사모)은 1321조 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약 21% 늘었다. 2020년 이후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오던 펀드 시장은 지난해 말 처음으로 1000조 원을 돌파한 뒤 올해 들어서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성장은 공모펀드에서 두드러졌다. 19일 기준 공모펀드 순자산은 595조 원, 사모펀드는 726조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사모펀드는 67조 원 늘어난 데 그친 반면, 공모펀드는 159조 원 증가하며 두 배 이상 성장 폭을 기록했다.
일반 투자자가 참여할 수 있는 공모펀드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7월 말 기준 공모펀드 판매 잔액은 300조5039억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약 233조 원에서 29.0% 늘어난 수치다.
유형별로는 단기금융펀드(MMF)가 167조 원으로 전체 공모펀드 판매 잔액의 55.5%를 차지하며 절대적인 비중을 보였다. 이어 채권형 펀드가 50조 원, 주식형 펀드가 28조 원을 기록했다. 대기성 자금인 MMF는 기업 단기 자금 운용 수요 확대로 연초 대비 22.78% 늘었고, 채권형 펀드도 41.6% 성장했다.
ETF도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말 ETF 순자산총액은 231조6514억 원으로 집계됐다. 연초 182조8211억 원에서 26.7% 증가하며 230조 원 시대를 열었다. 국내 상장 ETF 상품 수는 7월 처음으로 1000개를 돌파했고, 하루 평균 거래대금도 꾸준히 상승해 500억 원을 넘어섰다.
반면 주식형 펀드는 0.56% 증가에 그치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주식형 펀드의 약세는 ETF 성장과 직결된다. 전통적인 주식형 공모펀드는 높은 보수와 제한된 운용 효율성 탓에 투자자 이탈이 이어지고 있지만, ETF는 저비용·분산투자·실시간 매매라는 장점으로 자금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펀드 시장의 가파른 성장세는 투자자 자산배분 전략의 변화를 반영한다. 특히 ETF와 MMF를 활용해 안정성과 유동성을 확보하면서도 수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어, 성장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증시 상승 랠리와 펀드 시장 확대가 맞물리며 ‘머니무브’ 현상도 뚜렷하다. 고금리 기조가 정점을 지나고 코스피가 연고점을 경신하는 가운데, 은행 예금이나 부동산보다 주식·펀드 등 투자 상품의 매력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 증권사 계좌에서 대기성 자금으로 분류되는 투자자예탁금은 지난 19일 기준 72조5519억 원으로, 지난달 말(66조2992억 원) 대비 6조 원 넘게 불어났다. 16일에는 74조9281억 원을 기록하며 75조 원에 육박하기도 했다.
반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11일 기준 631조7520억 원으로, 지난달 말보다 11조9564억 원 줄었다. 불과 열흘 사이 약 12조 원이 빠져나간 것이다. 요구불예금은 언제든지 인출 가능한 입출금 통장 자금으로, 투자자들이 은행 계좌에서 자금을 빼 증시로 옮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동산 시장이 주춤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자료를 보면 7월 전국 부동산 거래량은 8만4437건, 거래금액은 31조6081억 원으로 전월 대비 각각 19.1%, 39.5% 줄었다. 6·27 대출 규제 시행 이후 전국 주거용 부동산 거래가 크게 위축된 것이다.
450조 원이 넘는 퇴직연금 시장에서도 펀드의 존재감은 커지고 있다. 특히 적립금을 활용한 타깃데이트펀드(TDF) 투자가 늘면서다.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23일 기준 TDF 총 설정액은 13조5766억 원으로, 지난해 말(11조1483억 원)보다 22.5% 증가했다. TDF는 투자자의 연령대와 은퇴 시기에 맞춰 투자 자산 비중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펀드로, 초기에는 주식 비중을 높게 유지하다가 은퇴가 가까워지면 채권 등 안전자산 비중을 늘린다.
특히 지난해 10월 퇴직연금 실물 이전 제도 시행 이후 펀드 수요가 더욱 커졌다. 업계에 따르면 제도 시행 이후 증권사 퇴직연금으로만 2조7000억 원 넘는 자금이 순유입됐다. 은행과 달리 증권사 퇴직연금은 ETF 직접투자가 가능해, 이전 자금이 펀드 시장 성장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실제 미래에셋그룹은 지난달 운용 고객 자산이 1000조 원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미래에셋증권(549조 원)과 미래에셋자산운용(430조 원)의 성장 덕분이다.
펀드 외형 확대와 증시에 유입된 풍부한 대기자금은 주가 상승을 떠받치고, 기업 자금조달 여건도 개선시키고 있다. 공모주(IPO)와 회사채 수요예측 등 발행시장에서 자금 순환의 탄력이 붙는 배경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펀드 시장이 커지면서 증시 수급이 안정되고, 최근 이어진 상승 랠리에도 특정 종목 쏠림이 아닌 전반적 유동성 확대가 나타나고 있다”며 “기업 자금조달 비용을 낮추고 투자 여력을 키워, 다시 증시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선순환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