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기준 331개 공공기관 중 77곳이 사실상 공석

탄핵에 따른 조기 퇴진 등으로 정권 교체가 짧아지면서 공공기관장 인사가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장 교체가 지연되면서 수장이 비어 있거나 임기만료 후에도 직무만 유지하는 ‘유령 체제’로 방치됐다. 이 같은 경영 공백은 단순한 인사 차원을 넘어 국가 정책의 일관성과 효율성, 집행력을 저해하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과 새 정부의 정책 방향 간 불일치로 인한 갈등이 결국 국민에게 피해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17일 본지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를 통해 331개 공공기관을 전수 조사한 결과, 77곳이 사실상 공석 상태였다. 현재 기관장이 없는 곳은 한국산업은행, 강원랜드, 한국수출입은행 등 29곳에 달한다. 한국가스공사, 한국석유공사, 한국수력원자력, 국민연금공단, 지역난방공사 등 임기가 곧 끝나는 35명의 수장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임기가 끝났지만 후임이 정해지지 않아 직무를 이어가는 ‘유령 체제’ 기관도 한국마사회, SR 등 13곳에 달했다. 전체 기관의 4분의 1이 공백 상태인 셈이다.
이 같은 혼란은 공공기관 경영의 특수 구조에서 비롯된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에 따라 기관장 임기는 3년, 이사·감사는 2년으로 규정돼 있으며 특별한 비위나 경영 부진이 없는 한 도중 해임이 어렵다. 대통령 임기(5년)와 어긋나는 제도적 미스매치로 인해 정권 교체기마다 갈등이 재생산되는 구조인 것. 정권이 바뀌면 전임자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새 정부와의 정책 불일치가 불가피하고 정책 집행은 속도를 잃게 된다.
정치적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임 정권이 임명한 기관장이 잔여 임기를 지키면 ‘알박기 인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반대로 새 정부가 교체 압박에 나서면 ‘찍어내기 논란’이 반복돼며 정치적 충돌이 격화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환경부가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산하기관 임원 명단을 작성해 ‘물갈이’를 추진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큰 파문이 일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던 ‘찍어내기’ 논란과 정치적 외풍의 민낯을 보여줬다.
관행 변화도 ‘미스매치’ 문제를 부채질했다. 이명박 정부 때까지만 해도 새 정부 출범 시 기관장이 사표를 제출해 새 정부의 재신임을 기다리거나 아예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2009년 오강현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이 해임 무효 소송에서 최종 승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후로는 임기가 보장된 기관장을 강제로 교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처럼 무리하게 사직을 종용했다가 법적 책임을 지는 경우까지 생겼다. 정부와 기관장 간 불협화음이 제도적으로 굳어진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사 공백이 현장에서 곧바로 사업 차질로 이어지고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에너지·금융·주택 등 민생과 직결된 분야에서 사업 집행이 늦어지고 정책 추진 속도가 떨어지면 공공서비스의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정권 교체기의 경영 공백이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국민 생활 안정성의 위협 요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배근호 동의대 교수(공공기관감사평가단장)는 최근 ‘새정부 공공기관 정책방향과 경영평가’ 토론회에서 “정권 교체기 갈등 최소화를 통한 조직 안정성 제고와 책임경영 체계 확립을 위한 명확한 임기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