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여름, 일본 도쿄돔이 웅성거렸다. 주니치 드래건스와 홈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상식적이지 않은 플레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중견수 앞 평범한 안타를 친 후 아무렇지 않게 2루까지 돌진했다. 그의 무모한 플레이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아! 다메(안돼)!” 경기장은 웅성거렸다. 그러나 그는 공보다 빨랐다. “세이프!” 2루심의 세이프 선언에 도쿄돔을 가득 메운 관중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확인할 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스고~이(대단하다)! 하야~이(빠르다)!” 그는 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수호신 이종범이다.
이종범의 플레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신바람야구다. 신명나는 우리 가락처럼 그의 플레이에는 흥이 넘친다. 늘 한 베이스를 더 가는 야구를 펼쳤고, 상식을 깬 야구로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늘 투혼으로 활활 불탔다. 이종범의 신바람야구는 세계 최강 수비력의 일본 프로야구를 동네야구로 전락시켰다.
이종범의 투혼은 눈물겨운 시련을 이겨낸 산물이기에 더욱 값지다. 1년 전인 1998년, 이종범은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이종범의 주니치 합류는 신선한 바람이었다. 당시 ‘재미없는 야구’라는 꼬리표가 붙은 주니치로서는 이종범이 천군만마였다. 그의 화려한 야구인생은 그렇게 일본에서 정점을 찍는 듯했다.
그러나 ‘바람의 아들’ 이종범도 부상 악몽은 피하지 못했다. 6월 23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가 던지 120㎞의 커브에 팔꿈치를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팔꿈치 골절상이다. 이 사고로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이종범의 신바람야구는 무참히 무너졌다.
이종범이 다시 타석에 들어서기까지는 꼬박 3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종범은 그해 67경기에서 69안타, 타율 0.230, 18도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시즌을 마쳤다.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 탈모증까지 생겼다. 그에게 더 이상 ‘바람의 아들’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승리에 대한 열망은 신바람야구의 원동력이 됐다. 1999년 그의 신바람야구는 다시 시작됐다. 부상 후유증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전성기 기량은 잃었지만 야구팬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일본엔 짧게나마 ‘리(이종범의 애칭)’ 신드롬이 일었다. 그래서인지 “‘리’가 누구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바람의 아들’이다”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허무맹랑한 답변이지만 일본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뜻을 음미했다. 범접할 수 없는 실력자였기에 누구도 물음표를 달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가. 1993년 해태에 입단, 1994년 196안타ㆍ19홈런ㆍ84도루를 기록했고, 일본 진출 전인 1997년에는 타율 0.324(5위), 30홈런(2위), 64도루(1위)로 30-60클럽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바람처럼 그라운드를 떠났다.
1998년 비운의 사건으로 날개를 잃었지만 한국인의 혼을 담아 열도를 누볐다. 이종범의 신바람야구가 있었기에 야구팬들은 행복했다. 그가 남긴 신화적 기록이 있기에 오늘의 한국 프로야구는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