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되어야 할 이름”, “끔찍하고 창피한 역사”, “검경의 수사가 필요하다” 서울대 조국 교수, 평론가 허지웅 등 전문가는 물론 대중이 경악했다. 그럼에도 결코 시시하지 않은 낯짝으로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오르내리거나 지식인들과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기리는 최소한의 행동인 노란리본에 대해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는 ‘노란리본을 오래 달고 있다 보니 훼손되고 너덜너덜해졌다…우리가 단원고 일부 유가족과 불손한 세력의 눈치를 보는 서울시와 정부를 대신해 나섰다’는 이유로 가위를 들었다.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가 과연 이 시대에 유효한 이유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든다. 제주 4.3 사건, 황해도 신천학살 등 무고한 이름들을 죽인 제노사이드(Genocide)의 주범이 2014년 서울 시청광장에 떳떳한 이름으로 설 수 있나. 그 배경엔 생명과 죽음 앞에 그 누구도 숭고하지 않을 이 없다는 상식에 대한 판단조차 유보된 것이리라. 극단의 논리가 오늘날 우리 사회 불가하게 도사리고 있음에 반증이다.
박문각 시사상식사전은 ‘북한에서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해 남하한 이들로 1946년 결성돼 무조건적 공격을 가했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역사의 한 줄이다. 진정 가위를 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다.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것은 역사 앞에 후안무치한 것이다.
지난 25일 서울 남산 중턱에 위치한 국립극장을 찾았다. 공연계의 관객 실종이라 할 최근 불황이지만, 연극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가 상연된 427석 규모의 달오름극장엔 70대 노인부터 30대 직장인 커플, 여대생까지 다양한 세대의 관객으로 빼곡히 찼다.
일제와 미군정 앞에 기댄 채 욕망을 부풀리고 배를 불려온 이중생이 사기와 배임횡령, 공문서 위조, 탈세범으로 몰리자, 법망을 피하기 위해 가짜 장례식을 치르는 내용이다.
떵떵거리던 이중생이 “내가 바로 살아있는, 아니 죽어있는, 살아있는 이중생이요!”라고 처절한 듯 우스꽝스러운 외침을 날리는 그 순간 세대 불문 관객은 오롯한 희열에 박수갈채를 쳤다. 고스란히 탐욕을 드러내며 동조하는 큰딸과 부인, 주워 먹을 것 없나 맴도는 주변인들까지. 배우의 입을 통해 살아 움직인 대사는 공감으로 파고든다. 1916년생 극작가 오영진의 1949년 발표된 희곡이 여전히, 2014년 대한민국에 부끄러움의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이데올로기의 상실을 떠나 탐욕의 극대화가 이기심을 낳은 현대사회. 상식과 비상식을 가르는 최소한의 공동선마저 무너진다면 우리는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백색테러가 횡행하던 1940년대 후반의 역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재림해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무엇일까.
“‘살인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현대에 맞게 고치면 ‘경제적 살인을 하지 말라’가 될 것이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언이 떠오른다. 역사책에 남겨두어야 할 ‘양민 학살’은 오늘 역시 물리력, 경제적으로든 더 이상 용납되어선 안 된다. 작은 목소리 탓에 힘없는 자들. 이들을 향한 2014년 우리의 낯빛에서 또 다른 얼굴의 제노사이드의 칼날이 드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