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폐막식을 앞둔 몬주익 스타디움은 8만여 관중으로 술렁였다. 마지막 올림픽 챔피언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주인공은 동양에서 온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청년은 코너트랙을 돌아 결승선을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 포효했다. 56년 묵은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1992년 8월 9일(이하 현지시간)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식 직전 열린 남자 마라톤 경기 장면이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44)의 드라마틱한 역주는 이미 22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가슴 뭉클한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으로부터 정확하게 56년 전 8월 9일은 또 다른 한국인 청년이 마라톤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고 손기정 옹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2시간 29분 19초)을 수립하며 우승한 손기정(당시 24세)은 한국인이지만 일장기를 달고 일본 대표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장기와 마주한 시상식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1936년 8월 9일은 그렇게 슬픈 역사로 기억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56년이 흘렀다. 그날의 슬픈 역사는 응어리가 됐다. 그러나 56년 응어리를 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운명의 장난일까. 황영조는 일본인 마라토너 모리시타 고이치와 금메달을 놓고 사활을 건 승부를 펼쳤다.
두 선수의 피 말리는 승부는 몬주익 스타디움을 2㎞ 남겨둔 상황까지 이어졌다. 이대로 스타디움에 들어간다면 스피드가 장기인 모리시타를 이길 수 없었다.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 정상부에서 승부수를 띄웠다. 내리막 경사로에서 스피드를 죽이지 않고 라스트스퍼트를 감행, 모리시타와의 간격을 벌렸다.
황영조의 승리였다. 오르막 경사로에서 체력을 소진을 모리시타는 달아나는 황영조를 보고도 추격하지 못했다. 사력을 다한 레이스였다. 황영조는 결승선을 통과 후 그라운드에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56년간 그토록 바라던 마라톤 금메달이었다. 1992년 8월 9일은 56년 묵은 응어리를 감동의 눈물로 씻어낸 가슴 뿌듯한 날로 기억되고 있다.
황영조의 금메달은 국내 마라톤 환경도 바꿔놓았다. 대회 수는 물론 실업팀 수도 늘었다. 상금 규모도 커져서 모든 선수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게 됐다. 동호인 수도 크게 늘어 이제는 전 국민 레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22년이 지난 지금, 역사가 기억하는 마라톤 강국 한국은 이제 그 명성을 잃었다. 케냐와 에티오피아가 주도하는 남자 마라톤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변방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모든 면에서 진화했지만 선수들의 정신력은 오히려 예전만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이다.
곧 8월 9일이다. 매년 이맘때면 헝그리 정신이 만들어낸 두 개의 금메달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절박함’이란 단어를 잃어 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