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안방마님들의 불타는 '예술혼(魂)'

입력 2006-08-21 10:03수정 2006-08-28 14:27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그룹소유 미술관 운영...미술계 파워그룹으로 부상

장기간의 침체에 빠진 국내 미술계에서 유독 따스한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무한지대(無寒地帶)가 있다.

재벌가 총수의 여인들이 운영하는 미술관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현재 국내 대기업이 직간접적으로 소유한 미술관은 7~8개 정도. 이 가운데 재벌가 안방마님이 맡아 하는 곳은 삼성의 삼성미술관 리움, SK의 아트센터 나비, 전 대우의 아트선재센터, 금호의 금호미술관, 쌍용의 성곡미술관 등 총 5 곳 정도다.

대부분 처음엔 호기심이나 취미 활동 삼아 미술계에 몸담았던 재벌가의 여인네들이 점차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가면서 미술 분야에서 웬만한 평론가들 못지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룹 총수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미술품 소장을 위한 구매력까지 갖추자 국내 미술계를 쥐락펴락한다는 말도 들리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 - 홍라희 여사 '부창부수(夫唱婦隨)!'

재계에선 예전부터 "경제계는 이건희 회장이, 미술계는 홍라희 관장이 양분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지난해 말 미술월간지인 ‘아트프라이스’가 전국의 미술계 종사자와 관객 2375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21%의 응답자가 '한국 미술계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홍라희 관장을 선택했다.

'1등 주의'를 강조하는 이건희 회장의 부인답게 미술관에서도 최고인 셈이다.

홍라희 관장이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은 총 3곳. 국내 최대 사립미술관인 호암미술관(용인 에버랜드 내), 로댕갤러리(삼성생명 본관 1층), 리움(한남동) 등이다. 호암갤러리(중앙일보 사옥 내)는 리움이 문을 열자 폐쇄됐다.

리움은 뮤지엄1과 뮤지엄2,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로 나뉘져 있고 대지 2500평, 연건평 9000평 규모다.

막내 여동생인 홍라영씨도 리움의 수석 부관장이자 총괄 부사장을 역임하며 대외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로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고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

홍라희 관장은 그 동안 고미술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70여 회의 각종 전시회를 개최했다. 지난해 국내 최초의 대학교 미술관인 서울대 미술관 건립에 물밑(?)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박수근 미술관의 고문을 맡아 미술가의 파워우먼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홍 관장의 파워를 알 수 있는 사례 한 가지. 서구에선 한물간 미니멀리즘이 90년대 말 국내에서 바람이 불었을 때 그 이유가 홍라희 관장이 미니멀리즘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왔었다. 이러다 보니 경제계는 이 회장이, 미술계는 홍 관장이 양분한다는 웃지 못 할 소리까지 돌았다.

중진 이상의 작가들도 자신의 작품이 ‘호암 소장품’이 됐다는 것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 내세울 정도다.

이는 이른바 재벌 미술관 관장으로선 유일하게 지난 67년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 출신으로 대학 때부터 학문적 소양을 쌓았던 것이 큰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 이병철 회장을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자신의 작품이 걸린 갤러리에서 였다.

홍 관장이 그룹내 미술관과 첫 인연을 맺게 된 때는 지난 95년 고 이병철 회장이 세운 호암미술관의 관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홍 관장에게 수십만원의 푼돈을 쥐어주면서 인사동에 가서 "마음에 드는 골동품을 사보라"고 시켰다. 인사동을 자주 방문하면서 골동품을 보는 능력을 키우게 하려는 이병철 회장의 속내였다.

어느 정도 안목이 키워진 홍 관장은 서예계의 대가인 소전 손재형의 소장품인 겸재(謙齋) 정선(鄭숩)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를 사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했다.

호암미술관은 82년 이병철 회장이 삼성문화재단(현 이건희문화재단)에 기증한 고미술품 2000여점을 토대로 설립됐다. 경기도 용인 본관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미술품 1만5000여 점이 소장돼 있으며 국보 및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도 100여 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홍 관장의 왕성한 활동 뒤엔 이건희 회장의 숨은 외조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 회장 자신도 문화재 사랑이 각별하다.

이건희 회장은 특히 조선 분청사기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박한 조선 예술의 미학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분청사기. 때문에 고미술업계에서는 귀한 물건이 나오면 선구매자로 이건희 회장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는 현재 금동미륵반가상 등 국보급 문화재 23점과 보물 80점을 소유하고 있다. 개인 소장자로는 국내 최다 기록이다.

이 회장은 최근 몇 년 사이에도 국보급 유물 5점을 사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문화재는 모두 서울 한남동의 삼성미술관 리움이 관리 전시한다.

현재 호암 수집품의 3분의 2 정도가 이건희 회장과 홍관장이 함께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관장은 지난해와 올해 초까지는 미국에 장시간 체류했던 이건희 회장과 함께 있느라 미술관 업무에 주력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리움을 자주 찾으면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미술계의 후문이다.

◆전 대우 김우중 회장 부인 정희자 여사 - 김선정씨 '모전여전(母傳女傳)'

지난 1999년 대우그룹이 파산되기 전까지만 해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아트선재센터 관장은 홍라희 삼성미술관 관장과 비교되는 미술계 파워우먼으로 통했다.

일례로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홍라희 삼성미술관장과 함께 유명 컬렉터로 통했다. 아트페어 등에서는 미술 딜러들이 “마담 정 나오셨느냐”고 직접 챙기곤 했다.

대우 몰락이후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정희자 관장은 여전히 서울 소격동의 아트선재센터와 경주 선재미술관을 보유하며 미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 전 회장의 장남 선재 씨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지었다.

정 관장은 지난해 6월 허리디스크 수술 직후 목에 보호대를 두르고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행사를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물론 당시 그의 딸인 김선정씨가 큐레이터로 참가하면서 격려차원이 컸지만 전시장을 돌면서 꼼꼼히 작품을 관람할 정도로 애정이 높다.

정 관장이 그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27여년 전. 당시 청전이나 심정 등 이른바 근대 동양화가의 작품을 수집하며 도상봉, 김환기 화백의 유화를 수집하며 컬렉터로 출발했다. 현재 미술사적 가치가 있고 대내외적으로 내놓을 만한 작품은 약 200여 점인 것으로 파악된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사실상 소유인 46억원 어치의 고가 미술품과 서울 아트선재센터와 경주 선재미술관이 소유한 200여점의 미술품은 값을 매기기도 힘들다고 한다.

한양대 건축학과 출신이지만 홍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을 수료하면서 학문적 내공도 쌓았다. 독일의 표현주의 작품을 선호하며 낸시 그레이브스, 앤젤름 키퍼 등의 작가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관장의 딸인 김선정 씨도 미술계의 이목을 한눈에 받고 있다. 김씨의 남편은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이며 김씨도 이수화학 지분 6%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미국 미시간주 크랜스브룩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예종, 중앙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해왔다.

한때 아트선재센터의 부관장 직까지 맡으면서 30대의 젊은 나이다 보니 실험적이고 발랄한 젊은 작가 등용에 주력해오면서 새로운 바람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04년 갑자기 부관장직을 사임했다. 미술계의 얘기를 들어보면 신진작가 발굴과 굵직굵직한 실험적 대형전시를 좋아했던 김 부관장에 비해 실질적인 미술관 경영을 해왔던 정 관장의 현실적 이해가 안 맞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엄마와 결별 후 홀로서기에 들어간 김씨는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 커미셔너를 담당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올해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임용 됐고 6월에는 2007년 스페인 현대미술제 주빈국 총괄커미셔너로도 활동하다 사퇴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 정 관장은 필코리아리미티드 대표이기도 하다. 이 기업은 현재 경주 호텔과 하노이 대우호텔을 운영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경주 소재 아트선재미술관을 운영하고 지원해 온 기업이다.

정 관장은 지난해 말 뇌수술을 받으며 한때 미술계를 떠날 것으로 예상됐지만 현재 관장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측은 “워낙 해외출장이 잦아 미술관에 자주 찾지는 않지만 건강이 비교적 양호하고 여전히 미술관 경영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한편 김 전 회장의 차남 선협씨가 옛 대우계열의 사회복지재단인 대우재단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우재단은 정희자 관장이 실질적인 이사장 역할을 맡고 있어 선협씨의 미술관 참여나 향후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아트센터 나비' 3년 준비끝에 개관 - 노소영 관장

아트센터 나비의 노소영 관장은 SK 최태원 회장의 아내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다. 지난 2000년 나비가 공식 오픈하면서 관장직에 올랐다. 하지만 나비 개관을 위해 3년간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나비의 전신은 워커힐 미술관으로 최태원 회장의 어머니인 박계희 씨가 맡았던 곳. 박 관장은 미시간 카라마주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며 생전에 국내 최초로 앤디 워홀전을 추진하는 등 미술 이론을 바탕으로 수준있는 전시를 기획했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 97년 시어머니가 운영하던 워커힐 미술관을 맡으면서 노 관장은 본격적으로 미술계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공식적으로는 남편인 최태원 회장이 관장이었지만 노 관장은 98년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독일 바이마르 시대의 사회비판적 판화와 데생전을 기획해 호평을 받았다.

나비는 워커힐 미술관시절 모았던 451점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노 관장의 의도대로 전시회보다는 미술교육 위주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공학과 경영학을 공부했기 때문인지 모든 면에서 합리적이길 원하는 노 관장은 미술관 밖에선 '차가울 정도로 깔끔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나비의 색깔을 결정한 것은 SK(특히 텔레콤)라는 기업의 성격이 강했다. 나비가 보여준 모든 작품은 통신과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과거 경희대 문화예술 경영학과에서 예술경영을 가르치는 겸임교수로 출강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미술관 경영에 주력하기 위해 사임했다. 대신 특강형식으로 관심사인 미디어아트에 관해 강의하기도 한다.

노관장은 미술관 경영 외에도 지난해 출범한 사립미술관 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래회’라는 재벌가 안방마님들의 봉사사교모임의 회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미래회에는 한솔제지 이인희 고문의 딸 조옥형씨, 한솔그룹 조동길 회장의 부인 안영주씨,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의 며느리 이수연씨, 삼부토건 조남욱 회장의 며느리 박선정씨 등이 회원이다.

◆금호미술관·성곡미술관...그룹 사정 따라 부침

금호미술관은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의 누이동생인 박강자씨가 맡고 있다. 미술관 컬렉션은 작가중심으로 400여점. 소장 대상 작품을 선정하는 데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2003년부터 대관료를 내는 사람들에게 임대하는 일반 갤러리로 변형됐다. 당시 모기업인 금호그룹의 자금사정 악화로 대관료를 내는 사람들에게 전시공간을 빌려주는 전시장으로 바뀐 것.

금호미술관은 지난 89년 비영리 공간으로 출발한 이후 13년 만에 갤러리로 전락하게 됐다. 대관 전시 유치는 임대업과 다름없어 사실상 금호는 미술관 운영사업을 포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강자 관장은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2002년 '내 마음의 낙원-어느 미술관관장의 사색과 명상의 꿈'이라는 타이틀의 가요음반을 내기도 했다.

쌍용그룹 김석원 전 회장의 부인인 박문순씨는 성곡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95년에 문을 연 성곡미술관은 연 15회 정도의 대형전시보다는 대중을 위한 소형전시 위주로 열다가 모기업이 와해되면서 한때 빛을 잃었다.

지난 2월 일본 태평양 시멘트에 쌍용양회의 경영권이 공식적으로 넘어가면서 휴관에 들어 간 것. 하지만 최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재개관을 했다.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 특히 도심 속 조각공원이 유명하다. 수령이 수십 년 이상 된 100여 종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총 1128평 규모다. 이곳에 쌍용그룹 창업주인 고 김성곤 회장의 생가가 위치해있기도 하다.

박 관장은 외부에 별로 나타나지 않는 편으로 미술관 경영에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로 해외 기획전을 살피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박 관장은 남편인 김석원 전 썅용 회장과 함께 미술관 본관 3층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부부가 자주 전시장에 들러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한편 LG, 한화, GS 등의 총수의 부인은 특별히 외부로 드러나는 문화사업을 펼치고 있지 않다. 총수가 대외적인 활동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면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기업규모에 걸맞지 않게 변변한 미술관 한 곳도 가지고 있지 않아 메세나 활동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요즘,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