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매뉴얼보다 훈련이다 -이은호 사회경제부장

입력 2014-05-2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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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후 정부 기관마다 나름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모으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가슴을 절절히 후벼 팠을 이번 참사의 교훈을 와신상담의 자세로 곱씹으며 이런 상황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아름다울 수밖에. 오랜만에 나라가 제대로 방향키를 잡은 것 같아 내심 쾌재를 불렀다. 지금까지 국민 세금으로 봉급은 꼬박꼬박 받아 챙기면서도 제 몫은 제대로 못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공무원들이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더더욱 고마웠다.

그러나 이들이 요즘 머리 빡빡 짜내면서 하는 일을 보면 잠시나마 공무원에 대해 가졌던 환상은 일순간 신기루처럼 확 스러지면서 ‘역시 철밥통’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대한민국 1% 엘리트’라는 공무원들이 요즘 벌이는 일은 바로 ‘정치한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다. 사고를 선박 사고부터 항공기 사고, 열차 사고, 교통사고, 공장 폭발, 홍수, 가뭄 등으로 세분해 하나하나 꼼꼼히 대응할 수 있게 하겠다는 소리.

여기서 뇌리를 확 파고드는 의문 한 대목. 과연 지금까지 이런 매뉴얼이 없어서 제대로 대응을 못 했을까. 아마 정부 기관들이 사고 날 때마다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모으면 서너 트럭 분은 족히 될 거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명성 자자한 사고 공화국. 그때마다 심혈을 기울여 이런저런 매뉴얼을 만들었을 테니 더더욱 그렇다.

이미 만들어 놓은 매뉴얼 또 만들어내느라 허투루 힘 낭비하지 말고 우리 ‘대한민국 1%’인 공무원들이 할 일이 있다. 바로 훈련이다.

선진국에서는 안전 교육을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에 따른 안전 훈련을 철두철미하게 시행하고 있다.

우선 캐나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기별로 자연재해는 물론, 일반 사고까지 유형에 맞춰 대응 훈련을 하고 있다. 지진이나 태풍이 잦아 재해 공화국으로 악명이 자자한 일본은 온 국민에게 유치원 다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전국 179개 체험장에서 재난대처훈련을 의무적으로 받게 한다. 미국도 주별로 자주 발생하는 재난과 위기 유형에 맞게 특화된 훈련을 하고 있다. 허리케인이 많이 발생하는 주, 홍수가 빈발하는 주 등 각주의 상황에 따라 다른 훈련을 받는다. 프랑스는 학교의 총괄 책임자가 반드시 사고 발생 시 대처하기 위한 내부비상대비계획(POI)을 세우고 학생들에게 행동 요령을 훈련하게 한다.

선진국들은 왜 그토록 큰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면서 재난 훈련에 매진하는 것일까. 매뉴얼이 존재해도 공무원과 시민들이 오롯이 실행할 능력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훈련을 수십 차례, 수백 차례 하릴없이 반복해 바야흐로 살아 숨 쉬는 무엇으로 만들겠다는 얘기다. 한 번 해보는 게 골백 번 듣는 거보다 낫다는 격언은 재난과 훈련이란 관점에서 전적으로 유효하다.

또 하나 선진국에 배워야 할 것은 바로 훈련 때 반드시 매뉴얼의 실효성을 냉정히 검증해본다는 것이다. 훈련을 하다보면 아무리 훌륭한 매뉴얼도 문제점이 드러나기 마련. 만일 매뉴얼에서 문제가 발견된다면 수십 년 된 것이라도 흔쾌히 뜯어고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 대한민국이 그토록 흠모해 마지않는 선진국의 ‘정치한 매뉴얼’이다.

그리고 시작한 김에 ‘미친 O’ 소리 들을 각오하며 하나 더 말해 본다면 지금 대한민국에 절실한 건 매뉴얼을 자잘하게 쪼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화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매뉴얼 지나치게 많으면 공무원도, 시민들도 이를 체화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무원 입장에서 필자가 얘기한 부분을 주장한다면 아마 비판을 듬뿍 향유하면서 ‘국민의 공적’이나 ‘공무원의 공적’이 될 수 있다. 훈련을 하자고 하면 시민들이 불편을 호소할 것이고, 메뉴얼을 단순화하자고 하면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누가 책임지냐는 다른 공무원들의 걱정 세례를 담뿍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반발이나 우려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 문제보다 앞설 순 없다. 모든 공무원이 욕먹을 각오로 나서지 않으면 풀 수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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