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ㆍ제약 등 전문기술 공부하며 일 배워…기업이 한해 실습비 54억원 부담
스위스 직업교육의 선진화는 기업의 역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직업고교에 입학하면 기업 근무를 병행하는 스위스 VET(Vocational Education Training) 제도는 학교와 기업이 함께 키우는 시스템이다. 기업과 교육기관 간 연계가 잘 돼 현장 밀착성이 뛰어남은 물론, 기업들의 직업학교 견습생과 졸업생에 대한 교육지원도 확실하다.
때문에 굳이 우리나라처럼 재직자 전형을 늘리거나 대학과 기업이 별도로 계약을 맺어 맞춤형 인재를 양산할 필요도 없다. 스위스를 기술 엘리트의 산실로 만든 산학협력 현장을 찾았다.
◇학교와 기업이 함께 키우는 스위스의 기술인재 = 스티브 잡스앨버트 아인슈타인빌 게이츠….
누구나 들으면 다 아는 IT과학기술 분야의 대가들이다. 또 스위스의 대표 헬스케어 기업의 주요 사업부문인 ‘로슈진단’의 직업훈련 강의실 이름이기도 하다. 지난달 24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기차로 1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로슈진단의 도시 로트크로이츠(Rotkreua). 이곳에선 강의실명 작명 솜씨만큼이나 창의적 기술인재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현재 IT 엔지니어링, 컴퓨터사이언스, 바이오, 제약, 화학, 바이오공학, 의료, 디자인 엔지니어 등의 분야에서 작년 기준 110명의 견습생이 일하며 공부하고 있다.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Training Staff)만 회사 내에 10명에 달한다. 1명당 10명의 학생을 맡고 있는 셈이다. 현장실습에 드는 비용도 기업의 몫이다. 로슈진단은 월 500~600(60만~70만원)프랑의 훈련생 임금 등을 포함해 1년에 4.5밀리언 프랑(CHF), 우리 돈으로 약 54억원을 투자하고 있다. 이같은 적잖은 교육비용이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안드레스 예거 HR팀 책임자는 “입사 후 재교육 과정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처음부터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지식을 가르쳐 이를 제대로 습득한 인재를 뽑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
훈련생들은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회사에 입사하면 약 4000프랑(470만원)을 월급으로 받는다.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의 급여(월 8000프랑)의 절반 수준이지만 경력이 쌓이면 급여 차이가 거의 없어진다고 했다. 견습기간 동안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제도나 복지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경우 사내 장학시스템을 통해 생활비 등의 지원도 가능하다.
때문에 스위스에선 기업, 학생 사이에 기술학교에 대한 선호도가 꽤 높은 편이다. 안드레스얀 피어 라이분거트 기술부 팀장은 “전체 스위스 기술 관련 회사 중 대부분이 직업학교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기술학교에 진학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1985년부터 지난해까지 이곳의 VET 과정 졸업생 수는 총 258명. 이 중 46%는 로슈진단을 포함한 관련 업체에 취업했으며, 나머지는 군대에 가거나 기술전문대학, 일반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승진에서 있어서도, 원하는 사회적 지위에 오르는 데도 별다른 어려움은 느끼지 못한다. 이곳에서 4년째 인포매틱 컴퓨터 사이언스 분야 직업훈련을 받고 있는 훈련생 티모 푸러씨는 대학이 아닌 직업학교를 선택한 데 대해 주변의 시선이 어떻느냐는 질문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친구들도 대부분 직업훈련학교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다”면서 “오히려 직업학교에서 배운 실용적 경험과 전문적 지식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더 크다”고 말했다.
◇‘경단청’ 없는 스위스…군대 가도 고용유지 = 스위스의 글로벌 식품가공기계 제조업체 뷜러(Buehler)에서 마지막 직업훈련 과정을 밟고 있는 파비안 오스발트(20)씨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걱정이 없다. 취업한 경우 군대에 있는 동안 65%의 월급을 받을 수 있으며 다녀와서도 고용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육아와 함께 군 입대로 인한 경력이 단절되는 청년이 많은 우리의 고용 현실과는 대조적이다.
직업학교 출신 직원들에 대한 회사의 교육 투자도 과감하다. 정밀기계 분야 훈련 교사로 일하고 있는 파트릭 볼트씨는 뷜러 입사 후 스위스기계산업협회에서 운영하는 단기 교육과정을 거쳐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급여를 받았다. 그는 “직업학교만 나와도 회사의 지원을 받아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데다 연봉도 대학 졸업 여부가 아닌 능력이나 경험에 따라 받기 때문에 인식이 좋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뷜러 임원의 80% 정도가 직업학교 출신이라는 회사 관계자의 설명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뷜러의 훈련생들은 설계용접가공디자인 등 기계제조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기술과 현장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입사 이후에도 타 부서의 업무를 이해하고 공유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특히 기계를 용접하고 다듬는 학생들의 손길도 눈에 들어왔지만 독특한 부서협업 교육시스템은 더욱 주목할 만했다.
이곳 학생들은 4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멀티 프로페셔널 프로젝트’(Multi Professional Project)라는 과제를 수행한다. 2명의 교사 지도 아래 3명의 학생이 한 팀을 이뤄 직접 고객의 기계제작 주문을 받아 아이디어 설계, 디자인 개발, 생산, 마케팅 등 전 과정을 직접 책임지는 형태다. 정밀기계, 화학바이오 분야에서 기술강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스위스의 경쟁력은 바로 도제식으로 학습시켜 마이스터로 키워 내는 산학 밀착형 직업교육 시스템에서 나왔던 것이다.
스위스 로트크로이츠·우츠빌=전민정 기자 puri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