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케인시언의 시대 -홍진석 온라인에디터ㆍ부국장 겸 국제경제부장

입력 2014-03-1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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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만큼 논란과 갈등을 빚어온 학문이 또 있을까. 경제에 대한 다른 사상과 정책은 학계 내부 논란에 머물지 않았다. 계층·계급 간 대립을 불러왔고, 국가 간 총칼을 겨눈 전쟁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1950년 터진 한국전쟁이 경제전쟁이란 주장도 그래서 나온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공산주의 계획경제 간 처절한 전면전이었다.

하지만 두 진영 모두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공산주의 진영조차 다양한 분파가 명멸하면서 부침을 거듭했다. 혁명 직후 시장과 가격체계를 무너뜨리고 배급과 계획생산 체계를 가동했다. 초기엔 눈부신 성장세를 자랑했지만 이내 자원배분의 왜곡과 불공평한 보상체계에 발목을 잡혔다.

동유럽에선 시장의 적극적 활용을 주장하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결국 소련마저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기치 아래 경제회복에 나섰지만 연방 해체로 끝나고 만다. 중국은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도 경제 운용에선 시장 기능을 적극 활용한 결과로 세계의 공장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자본주의 울타리 안에 동거하던 경제학자들도 이에 못지않다.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주의학파와 정부 개입을 인정하는 케인스학파 간 대결은 1930년대 이후 8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1970년대 오일쇼크 무렵 미국 경제학계에서 벌어진 일화는 두 학파 간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 경제학자들은 매년 한두 차례 한곳에 모여 토론을 벌인다. 바로 전미경제학회다. 물가 폭등을 초래한 오일쇼크 당시 케인시언과 시카고학파는 다른 처방전으로 맞섰다.

케인시언은 대공황 때처럼 정부의 개입에 무게중심을 뒀지만, 시카고학파는 시장 기능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 같은 대립으로 학파가 다른 경제학자들은 같은 비행기에 동석하는 것조차 꺼렸다. 사정을 잘 아는 학회 주최 측은 미국 전역에서 모여드는 경제학자들의 항공권 예약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직원의 실수로 시카고학파 중견교수가 케인시언에 배정된 여객기에 동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교수는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내가 탄 비행기가 차라리 추락하길 바랐다. 그래야 미국경제학이 바로 서고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

그의 살벌하기 짝이 없는 저주가 통했기 때문일까. 대공황 이후 미국 경제학계와 경제정책의 흐름을 장악해온 케인스학파는 1970년대 들어 변방으로 밀렸다. 대신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내건 시카고학파가 전면으로 부상했다. 시장에 의한 자원배분이 그들의 금과옥조였다. 시장중심론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 경제정책의 근간이 됐고, 영국에서 대처리즘을 낳았다. 하지만 4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시카고학파의 전성시대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막을 내렸다.

지나친 자유방임으로 금융시장 실패를 방조했다는 비난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미국 정부와 학계는 다시 케인스에 매달렸다. 케인시언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미국과 그 우방국들은 대공황에 못지 않은 금융위기란 비상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우선 과거의 경험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 학계 역시 경제학의 위기를 ‘대공황 해결사’란 케인스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케인시언들의 처방전은 당장 응급심폐술로서는 성공한 듯 보인다. 비상체제를 정상체제로 되돌리려는 국가가 늘고 있다. 하지만 경기회복을 위해 쏟아부은 재정확대와 통화팽창의 후유증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남겨져 있다. 출구전략의 수립과 집행은 경기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정상궤도로 접어들기 위한 통과 의례임이 분명하다. 그 시기와 방법의 선택에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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