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유의 촌철만담]영화 ‘변호인’과 21세기 ‘경제민주화’

입력 2014-02-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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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9월의 어느 날. 부산지역에서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이 이유도 모른 채 공안 당국에게 붙들려 갔다. 약 두 달간 살인적인 고문이 이어지며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빨갱이’가 됐다. 공안 당국이 밝힌 이들의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공안 당국에 맞선 변호인 측의 증거도 국가보안법 앞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혐의를 벗지 못한 채 억지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인기가 최근 화제가 됐다. 개봉 한 달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종영이 임박한 현재는 1100만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총 인구를 5000만명으로 보면 전체 국민의 5분의 1 이상이 이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영화의 바탕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라는 점을 감안해도 쉽게 예상치 못한 수치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는 얘기를 자주 한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도 일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의 진짜 이유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와 현재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데 있다. 권력을 가진 주체만 달라졌을 뿐 영화 변호인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부조리들은 당시와 변함이 없다는 거다.

과거 1980년대의 권력이 군부정권이었다면, 현재의 권력은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슈퍼 기업들, 그 중에서도 기업 최상위에 있는 재벌 오너들이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좋지 못해 싸늘할 정도다. 과거 개발연대 시절부터 꾸준히 자행해 온 불법 행위들과 이들에 대한 법 집행 과정에서 나오는 부조리한 모습들이 국민들에게 반감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2014년 현재 ‘경제민주화’로 발전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재벌 오너들에 대한 집행유예 금지를 골자로 한 경제민주화 법안까지 나올 정도니 할 말 다했다.

최근 법정에 선 재벌 오너들이 건강 악화를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하거나, 휠체어에 앉아 재판장에 출석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재벌 오너들에 대한 재판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모 대학병원 특실은 회장님들의 전용공간이 된다. 사회적 이슈가 됐던 ‘영남제분 사모님 청부살인’ 사건도 재벌 권력의 현 주소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힘, 권력이 있으면 법 앞에서도 무소불위(無所不爲) 의 자세를 취하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구(舊) 권력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힘과 권력보다는 논리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건강한 사회’다. 1980년대에 비해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지만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발전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자괴감도 나온다.

영화 변호인의 거센 인기도 건강한 사회를 갈구하는 국민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게 아닐까. 과거 부끄러웠던 자화상을 지워내기 위해서도 재벌 기업, 오너들의 변화, 그리고 이를 지적해 줄 수 있는 국민들의 냉철한 감시가 필요하다.

올해 초 재판장에서 외쳐진 검사의 말이 불현듯 생각난다. “한국 역사 속에서 재벌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뒤엔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젠 투명한 경영, 책임경영 등이 우선시돼야하고, 구태(舊態)가 되풀이되면 안된다는 점에 국민적 견해가 일치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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