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노”라고 말해선 안 되는 일본 -배수경 온라인뉴스부장

입력 2014-01-2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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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 극우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와 고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자는 1989년 펴낸 에세이 한 권으로 일본인의 의식개혁에 불을 지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이 160쪽 짜리 에세이에서 두 사람은 전후(戰後) 급속한 경제 발전과 산업 기술력을 토대로 세계 무대에서 막강한 힘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일본인에게 당당할 것을 주문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폐허에서 불과 40년 만에 경제 규모로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했고 기술력으로 중무장, 전자왕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명실공히 일본도 미국과 동반자적인 위치에 오른 만큼 ‘이제는 당당해지자’라는 게 이시하라 지사와 모리타 창업자의 주장이었다.

자세히 살펴 보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은 일본 정부의 자기 주장 없음에 대한 자아비판서다. 당시 이시하라 지사는 선거를 위한 프로파간다 용으로 이 에세이를 집필했다. 유권자들에게 자국의 우위성을 강조하며 자신감을 불어넣는 등 애국심을 자극하려 한 것이다.

이는 선거 유세용 책자에 그치지 않았다. 이 에세이가 쓰인 지 24년. 작금의 일본은 당당하다 못해 ‘안하무인’ 격의 행보로 근린국을 당혹케 하고 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해 일부 정치인들은 독도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영유권 갈등이 여전한 가운데 작년 연말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해 주변국과의 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은 세계 경제의 맏형인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강화시켰다. 작년 말 오키나와 시(市)가 미군 후텐마 비행장을 현의 북부로 이전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나고시 헤노코의 연안부 매립신청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양국간 17년의 숙원 사업이었던 미 해군의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가 말끔히 해결됐다.

또한 일본은 자국에 위협적인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환심을 사고 있다. 아베 총리는 최근 인도 방문에서 2100억엔 규모의 엔 차관 공여와 일본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 지원을 약속하는 등 경제협력을 대폭 강화했다. 지난 26일에는 인도 ‘공화국 기념일’ 행사의 군사 퍼레이드에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초대받아 양국의 돈독한 관계를 세계에 과시했다.

동남아 국가에 대해선 아베 총리가 1년에 걸쳐 동남아 10개국을 직접 방문해 2조엔의 지원과 대출을 약속했다. 중국과 동남아 국가 간 영유권 갈등을 이용해 아군을 늘린 것이다.

아베 총리가 한국·중국 등 근린국의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토록 외교 안보 태세를 구체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아베 총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연막작전으로 보인다. 한국과 중국이 자신의 야스쿠니 참배에 집중포화를 퍼붓는 동안 세계에서 입지를 넓히며 또다른 실속을 차리고 있는 모양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베 총리는 대내적으로도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추진해나가고 있다. 출범 2년째를 맞는 아베 정권은 내달 9일 도쿄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지난해에 이어 다시 ‘경제’를 앞세워 표심잡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아베 정권은 금융 완화와 거액의 재정 지출에 따른 엔저와 주가 상승 효과를 톡톡히 봤다. 아베 총리는 이 여세를 몰아 4월 소비세율 인상과 원전 재가동,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허용을 둘러싼 난제들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겠다는 속셈이다. 2020년 도쿄올림픽과 내년 9월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뚜렷한 장기 비전을 제시해야 장기 집권에 청신호가 켜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기억해야 한다. 주위는 나몰라라 하며 콧대만 세우다가 몰락한 일본 전자왕국의 비극을. 한때 일본의 자부심이었던 소니·샤프·파나소닉 등 간판기업들은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 세계 무대에서 도태됐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만 믿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얕잡아보다가는 언젠가 일본도 소니·샤프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런 처지에서도 지금처럼 “No”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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