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발행 잔혹사
동양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기업어음(CP) 잔혹사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동양그룹은 물론, 최근 몇 년 동안 문제가 된 재벌기업들은 CP에 의존해 부실을 감추고 자금을 조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CP는 회사채와 달리 발행상에 제약이 없다는 점에서 부실기업의 자금조달에 유리하게 활용됐다. 또 이사회의 의결 없이도 발행할 수 있고 한도마저 없다. 특히 증권사의 실사를 받지 않아도 되는 만큼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공시 의무도 없다.
그러다 보니 CP가 부실기업들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지난 2003년 16조원대였던 CP 발행잔액 규모는 10여년이 지난 지금 10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남발한 CP가 부메랑이 돼 기업들의 목을 죄고 있다. 계열사 해체는 물론 CEO의 법정구속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이른바 ‘CP의 저주’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9월 구자원(78사진) LIG그룹 회장이 실형을 받은 것뿐 아니라 장남 구본상(43) LIG넥스원 부회장은 징역 8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두 사기성 CP를 발행하며 경영권을 유지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
LIG그룹의 CP잔혹사는 지난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IG건설은 지난 2011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구 회장 등은 과거 LIG건설 인수 과정에서 담보로 제공한 다른 계열사 주식을 회수하기 위해 LIG건설이 부도 직전인 사실을 알면서도 2151억여원에 이르는 CP를 발행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11월 기소됐다. 경영권 유지를 위해 사기성 CP를 발행한 셈이다. LIG건설 CP 투자자 800여명은 LIG건설이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총 3437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부장판사 김용관)는 지난달 13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기소된 구 회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또 같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아들 구본상(43) LIG넥스원 부회장에게는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구본엽(41) 전 LIG건설 부사장에 대해서는 분식회계와 CP 발행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주주와 채권자, 거래 당사자 등에게 예측 불가능한 피해를 주고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질서를 왜곡시킬 소지가 큰 중대한 기업범죄”라며 “투명한 기업경영의 책임을 도외시한 이상 편취한 금액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이어 “그룹과 이해 관계가 없는 다수 피해자가 생겼고,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하고 있는 점,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진술을 계속 번복하고 조작한 자료를 제출한 점 등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피해자 595명이 낸 배상명령 신청은 배상책임 범위가 불명확하고 일부는 구 회장 일가로부터 보상금을 받아 피해가 회복됐다는 이유로 모두 각하했다.
LIG건설에 이어 이듬해 웅진홀딩스도 CP의 부메랑을 맞게 됐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68) 역시 지난 8월 1000억원대 CP 사기발행과 1500억원대 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부장검사 이원곤)는 웅진홀딩스 명의의 CP를 부당 발행해 1198억원을 챙기고 계열사를 불법 지원하는 방식으로 회사 측에 1560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배임)로 윤씨 등 웅진그룹 전현직 임직원 7명을 불구속 기소한 바 있다.
윤 회장은 지난해 7월과 9월 회사 재무상태가 악화됐지만 이를 숨기고 웅진홀딩스 명의로 1198억원 상당의 CP를 발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2009년 3월 계열사인 극동건설 소유 골프장인 렉스필드컨트리클럽(이하 렉스필드CC) 법인자금 12억5000만원을 토지 매입 컨설팅비 명목으로 인출한 뒤 웅진그룹 전직 직원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한 혐의 등 다수의 불법행위가 포착됐다.
검찰 관계자는 “피해 금액은 많지만 사익을 추구한 범죄가 발견되지 않았고 윤석금 회장이 20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해 기업 정상화를 도모한 점 등을 고려해 불구속 기소했다”고 설명했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동양그룹은 지난 9월부터 내년 말까지 총 1조8000억원 규모의 CP회사채 만기가 도래한다. 현재 동양그룹은 회사채 및 CP상환 여력이 부쳐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주)동양, 동양네트웍스, 동양시멘트까지 법정관리를 신청한 상태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금이 간 것은 추석 직전까지 동양그룹 위기설이 있음에도 동양증권 직원들에게 CP판매를 독려한 점이다.
동양증권이 (주)동양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소비자를 우롱하는 등 불완전 판매를 한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한편 지난달 30일을 기준으로 동양그룹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5개 계열사의 미상환 CP전자단기사채 회사채의 잔액은 총 2조1420억원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