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보는 경제] 야채세탁기, 감자세탁기 - 이준훈(시인, KDB산업은행 부장)

입력 2013-08-1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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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어느 시골 마을, 이 마을 사람들에게 세탁기는 아주 고약한 물건이다. 잦은 고장 때문이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탁기가 금세 고장 나고, 고치면 얼마 못가 곧 고장이 나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무슨 제품을 이 따위로 만드냐”면서 세탁기 생산회사에 불만이 심했다. 현장 수리기사들이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면 세탁기 안에 야채찌꺼기가 쌓여 있곤 했다. 기사들은 “세탁기는 빨래를 하는 것이지, 채소를 씻는 것이 아니다”면서 “세탁기로 채소를 씻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하지만 농부들은 계속 채소를 씻었고 걸핏하면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곤 했다. 세탁기 제조회사들은 이를 어떻게 했을까. 대부분의 가전회사 기사들은 ‘무식한 농부들’이라며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모 가전회사 기사들은 달랐다. 본사에 농부들의 현상을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은 본사는 “야채도 씻을 수 있는 세탁기를 만들라”고 생산부서에 지시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생산부서 엔지니어들은 야채 껍질이 잘 빠지도록 배수관을 넓히고 필터의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채소세탁기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모 회사란 바로 세계 최대의 가전회사 하이얼(Hier)이었다.

하이얼은 감자세탁기도 만들었다. 1996년에도 쓰촨성의 한 농민이 하이얼 세탁기의 배수관이 막혔다고 신고했다. 서비스 담당직원이 점검을 해보니 감자가 배수관에 걸려 있었다. 중국의 감자 생산 농가는 약 1억 명, 세탁기가 보급되자 중국 농민들은 감자를 세탁기에 씻었다. 이 사실에 착안해 하이얼은 1998년 감자전용 세탁기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

야채와 감자를 세탁기에 넣어 씻은 게 문제인가. 그리고 세탁기는 옷만 세탁해야 하는 것이 답인가. ‘우문현답’, 우리의 문제는 항상 현장에 답이 있다. ‘현문현답’, 문제도 현장에 있고 답도 현장에 있다.

문제를 포착하기만 하면 답은 그 문제에서 나온다. 다만 누가 그 문제를 포착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이얼이 야채세탁기, 감자세탁기를 개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은 농민들이다. 농민들이 세탁기에 야채를 넣고 감자를 넣은 것 아닌가. 하이얼은 고장을 없앤 것뿐이다. 창조경제,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새롭게 그리고 다르게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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