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조직의 성격은 분명했다. 시민사회와 함께 일본의 망언·망동과 싸우기 위한 조직이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이를 ‘관민 합동의 반일 추진 기관’이라고 정의했다.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스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적지 않은 일을 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 1997년부터 우리는 울릉도를 우리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으로 삼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독도가 아닌 울릉도였다. 오히려 일본은 독도를 기점으로 선언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뭔가 잘못 알고 있겠지? 아니다. 정말 그랬다. 흔히들 DJ정부의 어업협정 때 그런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YS시절부터 그랬다.
2006년에 가서야 우리도, 그야말로 ‘우리도’ 독도를 기점으로 선언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 아니었겠나? 당연히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일이었는데, 그 뒤에 알게 모르게 바른역사기획단이 있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로 시작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6년 4월 연설.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연설의 뒤에도 바른역사기획단이 있었다. 직접 연설문을 작성하던 대통령은 수시로 까다로운 자료들을 요청했다. 간담회와 토론회도 요구했다.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도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힘들게 싸우고 있는 시민사회와 함께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할 상설조직을 만들어 임시조직인 바른역사기획단을 대체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동북아역사재단.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묘한 일들이 일어났다. 수시로 새로 만들어질 상설조직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그 방향을 바꾸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특히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조직의 목표와 전혀 맞지 않는 인물들이 추천되곤 했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는 느낌이었다.
2006년 5월, 필자는 바른역사기획단을 떠났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그만두면서 단장직도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불안했던 느낌은 현실화됐다. 재단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예산은 축소되고 이사장은 애초의 목적과 거리가 있는 분이 선임됐다. 주요 기능도 어느새 ‘행동’이 아니라 ‘역사문제 연구’가 돼 버렸다.
정책기획위원장으로 다시 정부에 들어가면서 바로 재단 관계자들을 만났다. 원래 목적이 그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연구는 다른 예산으로 할 수 있게 해 볼 테니 시민사회와 함께 행동해 나가는 것을 주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가 있는 둥 마는 둥 애초의 목적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최근 아베 망언이 계속되면서 이 재단이 궁금해졌다. 뭘 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 이름 한 번 뜨지 않을까? 홈페이지를 클릭해 보았다. 아! 이럴 수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재단은 더욱더 점잖은 학자풍의 기관이 되어 있었다. 연혁도 합병된 고구려연구재단 중심으로 정리돼 있었다. 그 전신인 바른역사기획단에 대한 언급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그래 좋다. 행동하지 않아도 좋다. 연구에만 몰두해도 좋다. 애초에 행동하는 조직을 만들겠다고 한 게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모양이다. 실체도 형체도 분명치 않은 힘을 잘 몰랐나 보다. 그래, 졌다. 함부로 덤벼 미안하다.
그러나 부탁한다. 역사 문제를 연구하기 전에 재단의 역사부터 바로 정리해 주었으면 한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조용한 외교’를 넘어 우리도 이제 행동으로 보여 주자는 결의가 그 안에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길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그 안에 있었다. 계속되는 망언과 망동에 멍든 국민의 마음을 빌려 부탁한다. 그 뜻을 제대로 기록해 다오.